9개월을 살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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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필자의 마음이 유독 약해서 그런지 외국귀빈의 방한 소식에 신경이 쓰인다. 다음주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온다는데 두 아들의 검찰 소환을 눈앞에 둔 DJ로서는 그를 맞기가 면구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월드컵 개막식 때도 대통령이 많은 귀빈을 맞아야 할텐데 과연 거북함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어린이 날을 앞두고 DJ가 서울의 한 양육시설을 찾았다는 뉴스를 보고도 착잡한 생각이 오갔다. 세 아들이 다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터에 무슨 얼굴로 어린이들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경황없는 중에도 이렇게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구나 하는 안쓰러운 느낌도 있었다. 만일 그때 철없는 애가 당돌하게 "대통령할아버지, 아드님문제는 어떻게 됐어요?"하고 묻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떠올렸다.

執政능력 상당부분 상실

아들이 조사를 받든 말든 대통령인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별한다고 해도 대통령도 사람인데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정상 업무수행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DJ로서는 단순히 아들문제만도 아니다. 조카·처조카·비서·측근·평생동지… 등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침내 부인까지 의혹대상이 되고 말았다. 본인 혼자 달랑 외롭게 남았다고 할까, 그 주변 어디에도 성한 구석이 없다. 집권세력이 거대한 부패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 국민입장에서 보면 믿을 만한 권력기관이 없을 정도다. 검찰·경찰·국정원·청와대비서실 할 것 없이 비리의혹 관련자들을 쏟아내는데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이러고도 우리나라가 큰 혼란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다.

DJ는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국정에 전념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국정 전념이 될는지 의문이다. 물론 그의 지시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고 아직도 그는 공무원들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으로 따르고 존경하고 호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면종복배(面從腹背)하고 속으로 비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더이상 국민에게 호소하고 따라오라고 설득할 체면이 있을까. 이런 가운데 무슨 능력으로 '4대국정'에 전념할 수 있겠으며, 전념한다고 무슨 추진력이 나오겠는가. 결국 DJ의 지도력과 집정능력(governability)의 상당부분이 상실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대 대통령의 임기말엔 으레 '지도력 공백'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상태로 남은 9개월을 어떻게 보낼까. 나라에 큰일이 많고 어느 때보다 강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남은 9개월을 곱다시 허송·표류할 판이다. 9개월을 살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DJ의 결단이 필요하다.

가장 급선무인 정부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국민적 기대가 있고 야당도 동의하는 신망있는 총리가 권력과 책임을 갖고 9개월을 끌고가는 수밖에 없다. DJ로서는 더이상 국민호응도 얻기 어렵고 건강도 나쁜 만큼 국정 2선에 서는 게 좋겠다. 내각제의 총리처럼 권력과 책임을 갖는 새 총리가 나서 초당적 입장에서 정정당당한 검찰 수사의 환경을 만들고 민심도 일신함으로써 나라에 다시 활기와 기대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런 새 총리가 나와야 중립정부도 가능하다. DJ와 각료 6명이 민주당을 탈당했지만 진정한 중립내각은 여당서류의 이름 석자를 지우고 명찰을 뗀다고 되는 게 아니다.

'實權 총리'에 국정 맡겨야

민주당원이란 명찰은 뗐지만 그사람이 그사람 아닌가. 새 총리가 내각·정보·권력기관 등의 인사와 운영을 일신해야 중립정부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국정 2선에 선다면 당연히 청와대비서실은 대폭 축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청와대가 권력기관으로 있는 한 검찰의 아들수사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문제의 개운한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가급적 공식·비공식 행사를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 지금 그 입장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거나 무슨 당부를 한다는 것도 어색하고 거북한 일이다. 더구나 부정부패 척결이니 하는 말은 할 처지가 아니다.

곰곰 생각하면 지금은 중대한 위기다. 대통령책임제의 나라에서 대통령은 지도력을 거의 상실했고 국가 중요기관마다 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다. 권력의 위기, 신뢰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일이 언제 터질지 조마조마한 상황이다. 정부도 국민도 정치인도 모두 정신차려야 할 때다. 경황이 없겠지만 DJ가 특히 정신을 차려 지도자로서 필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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