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名筆… 국보급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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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안평대군 이용(瑢)은 타고난 명필이자 예술애호가였다. 그래서 그의 집은 묵향(墨香)을 사랑하는 당대의 학자와 예술가들로 북적거렸다. 안평대군은 그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붓을 휘둘렀으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따로 비단을 주문했다고 한다.

안평대군 스스로도 글쓰기를 즐겨 많은 사람들에게 휘호를 선물했는데, 국내의 애호가들만 아니라 중국 사신도 그의 작품을 청해 받아갈 정도였다. 당시 주요 문서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금속활자인 임신자(壬申字)도 그의 글씨를 본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양대군의 집권과정에서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았고, 반역자의 글씨라 해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임신자마저 녹여 없애버렸다.

대군의 글씨가 워낙 귀한 탓에 한문과 서예의 대가인 고(故) 임창순씨가 친필로 확신한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은 1987년 국보 제238호로 지정될 정도였다. 소원화개첩의 소장자는 지난해 3월 다른 소장품과 함께 이 글씨를 도난당했다고 신고했다.

고미술품 소장가 이원기씨가 이번에 처음 공개한 안평대군의 두 작품은 일제시대 때 사라졌던 작품으로 알려졌다. 안평대군이 남긴 글씨 가운에 유일한 예서(書)인 '사한소황후'는 원래 두 절구로 된 작품인데 일찍부터 한 쪽은 분실된 탓인지 37년 출간된 『아동백과대사전』에도 이 구절만 실려 있다. 이 글씨는 당시 일본의 유명한 소장가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글씨는 가로 26㎝, 세로 1백20㎝ 크기며, 왼쪽 아래편에 '청지(淸之)'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청지'는 안평대군의 호(號).

행서로 쓴 칠언절구 시(詩)는 보기 드문 연시(詩)다. 글씨는 '규리가아상탄식(閨裏佳娥常歎息)대영자문소인귀(對影自問素人歸)연래무의득소구(年來無意得騷句)하당군랑휴금유(何當君郞携琴遊)'인데, 뜻을 풀자면 '규방 속의 아름다운 여인 언제나 탄식하며/거울 보고 그 사람 오시길 스스로 묻고 있네/요즘에는 뜻이 없어 시구조차 못지으니/언제나 그 낭군 거문고 끼고 놀러 오시려나'가 된다.

이 글씨는 가로 47.5㎝, 세로 87㎝ 크기. 마지막 부분에 '비해당(匪懈堂)'이라고 서명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란 붉은 낙관이 보인다. '비해당'은 '게으르지 말라'며 세종대왕이 지어준 당호(堂號).

전각·서예 전문가인 정충락(鄭充洛)씨는 "두 작품에 찍힌 도장이 모두 당대의 귀족들이 쓰던 주사(朱砂·돌가루로 만든 도장밥)며, 바탕의 비단 역시 당시 안평대군이 특별히 주문해 썼다는 생초(生?)로 보인다"며 "글씨 역시 능숙한 조맹부체로 조선 초 왕족의 기개와 풍류가 묻어난다"고 평가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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