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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잦은전학과 전쟁속의 학창시절-작지만 야무지고 장난기 많은 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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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 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會昌)은 19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언진산맥과 멸악산맥이 닿은 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숭덕산(별칭 고덕산)일대는 소금강이라 불렸고, 서흥객관인 용천관, 차유령에 있던 용천역, 가마소 옆의 용사(祠)가 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는 서흥법원지청 검사분국 서기였던 이홍규(弘圭), 어머니는 김사순(金四純)이다. 4남1녀의 둘째 아들인 이회창은 그러나 서흥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38년 전남 장흥지청 검사분국으로 발령났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조숙했다. 여섯살 때 시장에서 쌀 한두되 사는 심부름을 다녔다. 그는 쌀을 한알 한알 깨물어 본 뒤 단단하고 단맛이 나는 것을 골랐고, 값을 치르고는 한 움큼 보태는 일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야무지다고 혀를 내둘렀다."(자전 에세이 『아름다운 원칙』,1997년)

호남에 간 이회창은 장흥을 거쳐 외가인 담양 창평에서 3,4년을 보내고 창평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광주에 사는 김사순의 친척 김승기(金承基·71)는 "검사서기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김사순씨가 창평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했다"고 전한다. 일제시대 검사서기 월급은 40원에서 70원. 쌀 한섬에서 한섬반 값이다.

外家서 쌀 얻어 먹어

반면 이회창의 외조부로 창평면장을 지낸 김재희(金在晞)는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해방 뒤 아들, 즉 이회창의 외삼촌들인 김홍용(金洪鏞·2대 민의원)·문용(汶鏞·2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성용(星鏞·6,7,9대 전국구 의원)이 담양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3형제 국회의원은 우리나라에서 이들뿐이다. 6·25 발발 직후인 50년 7월 김홍용은 "백두산 상공에 태극기가 휘날릴 것"이라고 연설했다가 8월 15일 공비에게 총살당했다. 이회창의 큰 이모 삼순(三純)은 균(菌)학자로 한국균학회가 그의 아호를 딴 '성지(聲至)학술상'을 제정, 해마다 시상하는 권위자다. 김재희는 창평공립보통학교에 최초로 여자반을 만들어 딸들을 입학시키는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홍규와 그의 가족은 박봉과 다투어야 했다. 때문에 김사순은 친정에서 쌀 한두되씩을 얻어왔고, 길눈이 밝은 이회창이 심부름을 했다. 이회창은 이홍규가 광주로 전근해 서석국민학교로 전학간다. 이후에도 자주 전학다녀야 했던 이회창의 술회다.

"전학이 싫었다. 새로운 땅에서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면 다시 미지의 땅으로 떠나야 했다. 짐을 꾸리면서 나는 늘 '또 낯선 동네로 가는구나. 이번에는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놀림받지 않는 아이가 될까'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아름다운 원칙』)

해방 후 이홍규는 순천지청 검사로 발령났다. 이회창은 4학년 때 6개월간 순천남초등학교로 전학간다. 서기에서 검사가 됐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과 박봉으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 김사순은 직접 닭을 길러 달걀을 내다 팔았다. 이 무렵 이회창의 일기는 "오늘 닭이 달걀을 하나 낳았다" "두개 낳았다"고 '중계방송'을 하고 있다. 5학년 때 이회창의 짝궁으로 광주에 사는 장봉섭(張鳳燮)은 "회창이네는 어려웠다. 가끔 굶기도 했다. 내가 감자를 싸와 함께 먹었다"고 전했다. 이 닭장은 청주를 거쳐 서울까지 따라온다. 김사순은 "수익성이 높다"는 말만 믿고 메추리를 길러 알을 팔려다 판로를 찾지 못해 실패하기도 한다.

45년 이회창에게 동생(會晟)이 생겼다. 이 때 일기엔 "동생이 태어났다" "아기는 잘 자고 있다" "아기와 놀았다"고 적혀 있다. 일기는 김사순이 이회창의 상장 등과 함께 서울 명륜동 자택 뒷광에 간직했다가 상자째 이회창의 부인 한인옥(韓仁玉)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회창은 야구·축구를 즐기는 장난꾸러기였다. 형 이회정(會正)은 "동생이 돌을 던져서 내 친구 함의근(咸毅根·뒤에 서울대 의대 병리학교수가 됨)의 머리를 깬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착해서 아프다는 얘기를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고 말했다. 또 "학예회 때 연극을 했다. 큰 복숭아에서 아이가 나와 나쁜 귀신을 정복한다는 것인데 회창이는 복숭아를 건지는 할머니역을 했다. 유머러스하게 잘해서 박수갈채가 요란했다"고 했다. 이회창 스스로는 최근 서석초등학교에 들러 "나는 짓궂었다. 장난치다 거름통에 빠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다른 일화들이다.

학업 성적은 좋았다. 장봉섭은 "5학년 때 담임(장봉출)이 내 형님이었는데 '공부 잘하라'며 나를 회창이 옆에 앉혔다. 나는 힘이 셌고 회창이는 작았지만 야물어 씨름을 많이 했다. 회창이는 공부를 잘했지만 노래를 못해 전교 수석을 놓쳤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5학년 때는 성적이 가장 좋아 급장(5학년 1반)을 맡기도 했다. 부급장을 한 문종택(文鍾澤)은 "회창이는 5학년 2학기 때 6학년 전교회장의 '직무대리'로 3천여명의 전교생 앞에 섰다"고 전했다.

이회창은 5학년 말 형 이회정의 권유로 월반시험을 봐 광주서중에 합격했다. 그러나 부친이 한민당 전남지부장을 구속했다가 검찰 고위층의 질책을 받고 청주지청으로 쫓겨가 입학식도 치르지 못한 채 청주중으로 전학간다.

이회창의 청주중 시절은 1년에 불과했다. 이홍규가 다시 이승만(承晩)대통령과 가까운 '족청계' 충북지사 尹모씨를 미국 구호물자 유용 혐의로 지검장이 출장간 틈을 타 구속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서울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청주중 동기 지헌정(池憲晶·임광토건 대표)은 "이회창은 키가 작아 청중(淸中)이라고 쓴 누런 가방이 땅에 닿을 듯 애처로웠다. 그러나 축구·야구·농구 시합엔 꼭 끼었다. 농구를 많이 하면 키가 커진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얼굴보다 큰 농구공을 들고 슛을 쏘아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회창은 형 이회정이 써준 원고로 웅변대회에서 1등도 했다.

이러다 이회창은 학기말 시험 대수에서 20점(60점 만점)에 그치는 실수를 한다. 형 이회정은 "시험공부에 애썼다고 어머니가 콩가루로 된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가 동생에게 '시험 잘 봤니'하자 우물쭈물하더니 일어나서 나갔다. 그리곤 안돌아왔다. 가출한 것이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회창은 "내 능력으론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 없다. 화물기차라도 타고 서울로 가 돈을 벌어 고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회창은 집에서 삼십리나 떨어져있는 조치원역까지 걸어갔다가 한밤에 수배에 나선 이홍규와 조치원역 역무원이 연락이 닿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회창이 성적에 압박감을 가진 것은 집안의 교육열 때문인 것 같다. 이홍규는 경성제일고보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왔다. 그의 형 이태규(泰圭)는 경성법전을 거쳐 교토(京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로 교토대 교수를 지냈다. 이태규는 69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오른 양자화학자다.

이런 부모의 집안 배경은 후에 이회창이 '귀족'이라고 공격을 받는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회창 측은 "시험에 붙거나 노력해 성공한 경우는 있어도 지위나 재산을 물려받지 않았다"며 반박하고 있다.

이홍규가 기억하는 이회창의 청주중 시절엔 이런 일도 있다. "집으로 누군가 분재를 보내온 모양이야. 그랬더니 애들이 아버님이 돌아오셔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큰일난다며 즉각 돌려보냈다고 하더구먼."

이회정도 "들고 온 것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고 말했다.

중2 때(48년) 이회창은 경기중으로 전학한다. 중·고시절 친구인 서병국(가꾸다상사 대표)은 "공무원 자녀에겐 부친 전근으로 인한 전학이 허용됐다"고 말했다. 쟁쟁한 수재들이 모인 경기중에서 이회창의 적응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해 4백20명 중 3백5등을 했다. 수학·음악 과목이 처졌다. 학적부엔 건강이 창백(蒼白), 흥미 '별무(別無)', 통솔력·적극성 모두 '무(無)'로 적혀 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셈이다.

검사 부친 한때 구속돼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진 해는 이회창에게 특별히 어려운 시기였다. 3월 26일엔 아버지 이홍규가 이회창 눈앞에서 수갑을 차고 끌려간다.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줬다고 구속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해방후 검사 구속 1호다. 충북지사를 구속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한다. 이홍규는 조사를 받는 동안 구타·물고문·전기고문·잠 안재우기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회정은 "변호사 30여명이 무료 변론에 나서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했다. 그 중 한명인 김달호 변호사는 변론에 참여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받고나서는 '부인,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이홍규는 직권 남용으로 기소됐다 보석으로 나왔다.

이 사이 6·25가 터진다. 이홍규 문제로 제때 피란가지 못한터에 이회정마저 징용 걱정에 바깥 출입을 못해 이회창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닌다. 예산에 사는 종친 이회운(會云)은 "이회창이 3박4일을 걸어서 예산 종가에 와 쌀 한말을 얻어 짊어지고 서울로 걸어올라간 게 몇차례"라고 기억한다. 이홍규 가족은 결국 예산으로 피란가 삽교의 작은 아버지 이선규(善圭)집에 머물렀다.

30호 가량의 마을로 주민들이 '누구 온다'고 알려주면 이홍규 가족들이 숨었고, 이회창은 추수를 돕다 볏짚이 가득 실린 지게를 지고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이회창은 가끔 그 때 다친 곳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회창은 9·28 수복으로 상경했다가 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간다. 이홍규와 이회정은 바로 합류하지 못해 이회창은 소년 가장이 된다.

당시 이홍규의 친구인 김봉렬 부산체신청장이 관사에 다다미 석장짜리 방 한칸을 내줬다. 서병국은 "대문 옆 자그마한 툇마루와 방 한칸이었다. 다섯식구였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경기중이 구덕산 근처에 천막학사를 차렸으나 그는 갈 수 없었다. 대신 김봉렬 청장의 도움으로 부산체신청 5급 20호봉 말단 노무직 공무원으로 취직한다. 월급을 깡통에 담아놓고 하루 하루 썼다고 한다.

"봉급과 반말의 쌀로 우리 식구는 한달을 버텼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엔 부산역 광장으로 나가곤 했다. 모두들 도시락을 꺼내먹는데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이는 겨울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찬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는 특히 동생들의 굶주림에 마음아파했다. 일기엔 "동생이 다른 아이들의 과자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팠다. 동생에게 '너 저것 먹고 싶으냐'고 하면, 그 애는 '아냐, 나 저런 것 먹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기백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달랐기에 나는 슬펐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회창은 배고픔을 못이겨 동네 친구들과 함께 미군부대에서 빵을 훔친 일도 있다고 한다. 그 스스로 "당시 친구들은 소시지도 훔쳐먹었는데 난 그게 뭔지 몰라 바보같이 빵만 훔쳐먹었다"고 주변에 토로한 적이 있다.

이회창은 그러나 어려운 처지를 친구들에겐 내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병국과 배도(裵渡·효성물산 고문) 등은 "회창이가 배를 골았다는 얘기나, 아버지가 구속됐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다만 공부를 마치고 오는 우리들에게 '요새 공부 많이 했느냐'고 안타까운 듯 물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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