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장·주장 산업클러스터를 활용해 국익 극대화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동아시아의 진주’로 일컬어졌던 홍콩은 요즘 재도약을 꾀하고 있다. 종전에는 금융·무역·관광·물류 허브를 바탕으로 선진 경제를 구축했지만 요즘엔 패션·예술·과학기술 등의 분야에까지 허브 역할을 욕심내고 있다. 와인을 한 병도 생산하지 않지만 ‘와인 허브’를 추구하고, 홍콩 아트페어를 통해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에게 손짓한다. 창의력과 혁신과 융합을 모토로 성장동력을 재정비하는 사례들이다.

홍콩의 도심 중 하나인 완차이(灣仔) 정부청사에 가면 창신과기서(創新科技署·ITC)라는 독특한 정부 조직이 있다. 홍콩의 미래를 구상하고 설계하는 곳이다. 이 부서의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ITC를 상징하는 보라색 로고 ‘π’가 한눈에 들어온다. ITC의 알파벳을 결합한 모양새이지만 무한대의 창의력과 혁신을 지향하는 ITC의 이념을 잘 말해주는 상징이다. 7년 전 홍콩 정부는 21세기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확대한다는 목표 아래 ITC를 창설했다. ITC의 구상은 정부 부처와 홍콩과기원(HKSP) 등을 통해 액션플랜으로 발전한다. 민간 기업들은 이를 바탕으로 투자 계획을 가다듬는다.

홍콩이 변신하는 배경에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중국 경제를 120% 활용하겠다는 속셈이 숨어있다. 더욱이 상하이·광저우·선전 등과 경쟁하려면 양(量)보다 질(質)로 승부를 내야 할 판이다. 홍콩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지난해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올해 5% 안팎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아시아의 월드시티’를 지향하는 홍콩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까. 지난 14일 ITC 본부에서 앤드루 라이(중국 이름 黎志華·40·사진) 부(副)서장(Deputy Commissioner)을 만나 속내를 들어봤다. 라이 부서장은 홍콩을 동아시아의 혁신·기술 허브로 성장시키기 위한 실무 책임을 맡고 있다. ITC의 프로젝트 기획·금융지원·사업수행 등을 총괄한다. 그는 홍콩대 졸업 뒤 하버드 공공정책대학원 석사학위(공공행정 전공)를 받았다. 92년 공무원이 돼 기획·환경·주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해왔다.

-ITC의 미션은 무엇인가.
“21세기는 혁신과 기술의 시대다. 두 가지가 제대로 결합돼야 상품·서비스의 부가가치가 올라간다. 누구나 중요성을 알지만 현실로 옮기기는 힘들다. 바로 부문 간 융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융합은 기술·제품, 서비스, 산업의 창조적 재조합이다. 융합해야만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홍콩이 월드 클래스의 지식기반 경제를 이끌어가려면 융합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홍콩은 과거 50년간의 경제 성장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왔다. ITC도 마찬가지다. 융합의 공간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큰 미션이다. 우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산업화되도록 연구개발(R&D)을 지원하고, 첨단 기술이 개발되면 연관산업 분야로 이식되도록 도와준다. 이를 위해 창업 인큐베이터를 비롯한 각종 산업 인프라를 갖추었다. 혁신과 기술을 주도할 우수 인재들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반 시설들을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갖추려고 노력 중이다.”

-홍콩의 새로운 발전 컨셉트는 무엇인가.
“지난 세기에 홍콩 경제를 받쳐주는 4대 성장 축은 금융·서비스·물류·관광 분야였다. 금융 분야에선 영국의 선진 시스템을 전수받아 세계적 수준의 금융 허브를 구축했다. 돈이 오가는 곳에 사람과 물자가 모였다. 과거의 번영은 금융과 서비스가 주도했다. 미래의 100년도 4대 강점 분야를 기반으로 중국으로 가는 관문, 중국이 세계를 보는 쇼룸(showroom)의 위상을 극대화해 해법을 찾을 작정이다. 새로운 발전 영역을 6개 부문으로 설정했다. ▶혁신 ▶인증 ▶교육 ▶제약 ▶IT 창조산업 ▶환경이다. 미래 성장 잠재력이 큰 분야들을 골라 압축한 것이다.”

-홍콩에는 제조업 기반이 없는데 IT를 성장동력으로 삼았다는 게 이채롭다.
“홍콩은 금융산업 경쟁력을 자랑하지만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홍콩의 대학 가운데 3~4곳은 늘 아시아 10위권에 들 만큼 우수한 연구 능력을 자랑한다. 홍콩의 8개 대학 모두 연구 중심 대학을 지향한다. 금융은 경제를 돌리는 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홍콩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자산을 풀가동할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 시장으로 성장하는 중국 대륙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수백만 개의 공장이 있는 광둥성 산업지대에 홍콩은 창의적 영감을 불어넣고 신사업을 키워주는 인큐베이터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홍콩의 미래 전략에서 가장 큰 경쟁자가 있다면.
“경쟁자를 자극할 수 있어 언급하기 곤란하다(웃음). 혁신을 수행하는 데 최적의 위치를 갖고 있다면 우리의 경쟁자가 아니겠는가.”

-기술과 금융의 융합은 어떻게 구상하나.
“우수한 연구 인프라와 두터운 연구 인력 층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성공 사례들이 나온다. 2001년 조성된 HKSP는 이런 목표에 따라 원스톱 인큐베이터 창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2만㎡ 규모의 HKSP에는 세계적인 화학그룹 듀폰의 R&D센터가 입주하는 등 300개 기업의 R&D 센터가 둥지를 틀었다.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에 선발된 신생 기업에는 50만 달러 규모의 자금도 지원한다.”

-한국의 강점 분야 중 하나는 IT인데 한·홍콩 협력방안은 없는가.
“우리가 아주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HKSP는 창의적 발상과 첨단 기술을 갖고 있는 한국 기업들을 환영한다. 홍콩의 풍부한 자금력과 연구 인프라 속에서 성공적인 아이템을 개발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한국 공학도들에게도 기회가 열려 있다. 홍콩의 대학들에 와서 중국과 아시아, 세계 각국에서 온 인재들과 경쟁하면서 꿈을 개척하길 바란다.”

-아시아와 중국의 경제 관계는 어떻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하나.
“21세기가 아시아의 세기라는 것은 경제 성장률, 무역 규모, 투자액 등 수많은 지표들이 말해주고 있다. 아시아의 세기를 이끄는 기관차는 중국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경제 성장에 올라타야 한다. 세계의 공장, 세계의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의 발전 방향을 연구하고 혁신하는 국가만이 성장의 과실을 누릴 수 있다. 기술이든, 자원이든, 인재든 자신의 강점 분야를 최대한 활용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래 성장전략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 건넬 만한 조언이 있다면.
“홍콩에 오는 비즈니스맨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홍콩에 뭔가를 팔러 오지 말고 홍콩을 통해 대륙을 보라는 것이다. 홍콩은 중국으로 가는 관문이자 중국이 세계를 보러 나오는 쇼룸이다. 21세기에는 클러스터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다. 거대 시장을 바탕으로 중국은 이 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상하이 주변의 창장(長江)삼각주 클러스터뿐만 아니라 홍콩·광둥성이 함께 추진하는 주장(珠江)삼각주 클러스터를 주목해야 한다. 중국 경제는 양대 산업기지를 육성하면서 계속 커 나갈 것이다. 한국도 홍콩처럼 산업 부문에서 중국의 클러스터와 접목하는 단계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발전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홀로 가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때에 대비해 인재·기술·자본에 관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용환 특파원 narrativ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