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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열두 번째 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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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 마음이 달라졌다. 비록 한 골을 먼저 먹었지만 왠지 질 것 같지 않은 느낌,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가 잘한다는 현실이 신나는 변덕을 부리게 했다. 무엇보다 조직력이나 정신력 같은 한국 축구를 수식했던 전형적인 모습보다 기술 축구와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모습이 놀라웠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쑥 커버린 것일까. 2%만 더 잘해 준다면, 조그만 실수만 없다면. 승리와 8강의 새 역사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스전 때는 박지성의 골에, 16강 진출 때는 박주영의 골에 승운이 달려 있다고 걸었던 개인적인 주문이 맞아떨어졌기에, 8강 진출에는 박주영의 두 번째 골이나 이동국의 골에 다시 한번 운명을 걸어봤다.

비가 철철 내려 유난히 더 서글퍼 보였던 패배와 눈물은 안타까웠다. 불운과 오심과 사소한 실수들을 떠올리며 잠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은 역시 팀 전체의 실력밖에 없기에 냉정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그 실력차란 겨우 골대 안쪽이냐 바깥쪽이냐의 가느다란 기둥 하나 차이였다.

열두 번째 선수라 불리는 팬으로서 나는 어떤 노력을 했던가. 기껏해야 망신만 안 당하면 좋겠다는, 누가 골을 넣지 않으면 질 거라는, 16강은 운이 좋아서였다는 바보 같은 생각만 하지 않았던가. 2002년은 그저 기적이었고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편파판정의 도움이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 축구는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를 키워왔고 2006년 원정 첫 승, 이번 원정 16강 등 차곡차곡 전진해 왔다. 월드컵 무대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던 우리가 도박사들이 걸었던 세 자리 숫자 분모의 우승 확률을 비웃으며 이탈리아도 프랑스도 못해낸 16강을 해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찬스를 허공에 날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찬스를 만들어내 다른 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뛰어난 팀이었다. 변해가는 한국 축구의 모습은 가슴을 설레게 했고 이제는 확신을 갖고 우리 팀이 전진해 나간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축구가 정상에 서는 날은 언제일까. 단편적인 비교는 무리지만 야구에 그 해답이 있어 보인다. 경기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축제 분위기를 펼쳐 보이는 야구 관객의 뜨거움이 바깥에서 한국 야구를 세계 정상급에 우뚝 설 수 있게 했다. 축구장에서 그런 풍경이 펼쳐질 때 언젠가 한국 축구도 정상에 우뚝 설 것이다. 그것이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의 열두 번째 선수들의 의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