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가르흐(과두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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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말부터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서는 러시아의 대표적 인권단체인 '사하로프 인권재단'에 지원된 한 기부금을 놓고 말이 많다.

논쟁은 현재 정치적 망명 상태에 있는 러시아의 대표적 올리가르흐(과두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사하로프 인권재단에 3백만달러를 기부하면서 시작됐다. 비판적 인권운동가들은 "올리가르흐의 돈이 러시아의 양심을 샀다"는 입장인 반면 사하로프의 부인인 엘레나 보네르 여사와 주변 인사들은 "인권재단의 존립을 뒷받침할 경제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이 돈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현실론을 펴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의 올리가르흐들은 혼란을 틈타 러시아의 부를 수탈, 자신의 배를 불린 탐욕스런 집단으로 매도된 비판의 표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어려운 현실'과 '최상의 순수 추구'라는 이상의 괴리에서 갈등을 겪는 러시아 지식인들과 인권운동가들, 예술가들의 최대 후원자로 변신하고 있다.

베레조프스키 외에도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열린 러시아 기금'이라는 단체를 세워 대학생들을 지원하고 있고 블라디미르 포타닌은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 있다. 러시아에서 올리가르흐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6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 7대 금융재벌로 불리던 대표적 올리가르흐들이 참여, 옐친 재선에 결정적 기여를 하면서부터다. 이들은 선거 후 구성된 초대내각에서 재무장관직과 독립국가연합(CIS)집행위 사무총장 자리를 할양받았고 국유기업 사유화 과정에서도 특혜를 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대표적 정치인과 유력인사의 자제들에게 접근해 용돈을 던져주고, 인맥을 형성했으며 사설 정보회사를 차려놓고 주요 각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도청까지도 감행했다.

이런 이들의 태도가 변한 것은 푸틴이 새 대통령에 당선된 후 여론을 적절히 활용, 이들 중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몇명에게 단죄의 칼을 겨누면서부터다.

푸틴시대를 맞아 올리가르흐들은 적극적으로 이미지 개선에 나섰으며 그 중 하나로 기부행위를 강화하고 있다. 올리가르흐의 대변인들은 "올리가르흐를 초기의 이미지로만 재단할 필요는 없다"며 "러시아 올리가르흐들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과 봉사의 출발이 이제 시작됐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 것인지 아직 판단이 이른 느낌이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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