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 약인가 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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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 행사를 놓고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의 경영권 위협에 맞서는 '백기사 역할론'에서부터 ' 수익성 우선'까지 입장도 각각이다.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는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이란 점에서 시장원리에 맞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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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적극적 역할론을 주장하고 나선 한국투자신탁운용 권성철 사장은 지난주 "외국인 투자자가 부당하거나 지나친 경영간섭을 하면 의결권 행사 등을 통해 백기사 역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소버린과 SK, 헤르메스와 삼성물산, TCI와 KT&G의 사례를 들며 최근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업 간섭과 공격이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다른 국내 대형 운용사 대표도 "외국계 펀드들이 국내 기업이 안정적인 경영을 못 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에서 국내 기관투자가가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외국계와의 갈등 때 국내 기업의 편에 서는 것이 펀드 수익자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정서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은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법안을 제출해놓고 있다.

그러나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한 국내 대형 운용사 관계자는 "기관투자가가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수익자의 이익 원칙에 어긋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 등에 대해 '외국계가 토종기업을 간섭한다'고 보는 것은 글로벌 시장에선 통하지 않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외국계 운용사들의 입장은 더 단호하다. 도이치투신의 남창근 대표이사는 "민족주의나 애국심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감정적 시각이 늘고 있는데, 이는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 기준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원칙은 간단하다, 수익자 이익이 최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소장은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는 해당 기업과 정부의 몫인 만큼 기관투자가들이 나서는 것은 문제"라며 "특히 우리나라 운용사들은 자금 조달을 기업에 의존하는 측면이 크고, 재벌 계열사 등으로 엮인 경우도 많아 독립적으로 의사를 밝히는 데 어려움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금까지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는 대부분 경영진쪽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추세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3월 공시된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 중 경영진 의견에 대해 찬성이 1914건(95.1%)으로 대부분이었으며, 반대는 17건(0.8%)에 불과했다. 반대 중 12건은 SK 주총에서 소버린이 제안한 안건에 대한 것이어서 이 역시 경영진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윤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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