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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16회 공기업 민영화> 민영화 보고에 DJ "주공·토공은 왜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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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제의 위기 속에 아픈 소리 들릴 때/북악의 산자락에 달빛 고이 흐른다/반개혁의 세력 향해 활을 쏘는 개혁자/무엇을 어찌해야 거친 꿈을 이루나…."

1998년 4월 말.

서울 수유동 크리스챤 아카데미 회관에선 이른바 '개혁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선구자'를 개사(改辭)한 이 노래는 이계식 당시 기획예산위원회 초대 정부개혁실장(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이 만들었다. 이날 정부개혁실 직원 20여명은 첫 워크숍을 열고 노랫말처럼 '반개혁 세력'과의 일전을 대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기획예산위는 DJ 취임 전인 98년 1월 1차 정부조직 개편으로 신설돼 공공부문 개혁을 맡았다. 이계식은 행시 8회로 공직에 잠시 근무하다 미국 유학을 떠나 학자로 변신한 인물로 1차 정부조직 개편에 참여해 정부개혁실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진념 초대 기획예산위원장(현 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 후보)의 회고.

"정부개혁실은 과거 한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실험'이었다. 실장에서 국장·팀장까지 9명을 민간 전문가로 채우고 이들에게 정부와 공기업 수술을 맡겼던 것이다. 조직의 요직을 전부 민간 전문가로 임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민간인에 공기업 수술 맡겨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정부개혁실은 4월 출범 후 두달 남짓 사이 59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대한 정비작업은 물론 1백8개 공기업의 민영화 청사진까지 만들어 냈다.

박진 당시 행정3팀장(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회고.

"각 공기업 노조와 경영진에게 수차례 의견 진술 기회를 줬다. 민영화가 가능한지 KDI 등에 자문하고 관련 부처 협의를 거친 뒤 다시 기획예산위 내부 심의를 통과해야 했다.관련 자료만 수만 쪽에 달했다."

6월 24일.

진념은 정부개혁실이 만든 초안을 DJ에게 보고한다. 진념의 짧은 설명 후 DJ의 질문이 이어졌다.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는 민영화할 수 없습니까?"

"저희는 민영화나 통합이 좋다는 의견이지만 건설교통부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기획예산위 의견이 맞는 것 같소. 국정교과서는 어떻습니까?"

"교육부가 교과서 공급에 문제가 생긴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교과서 공급도 민간에 맡겨 경쟁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진념의 회고.

"대통령께선 한국통신이 시내전화사업을 안 내놓으려 한다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기회다 싶어 우리는 하고 싶었지만 소관 부처의 반대로 못했던 부분을 대통령께 보고했더니 우리 쪽에 힘을 실어줬다."

보고를 마친 진념은 6월 30일로 예정했던 1차 민영화 계획의 발표를 7월 초로 미룬다. 그리곤 각 부처 장관을 전화로 불러 DJ의 지시를 전했다. 온갖 구실로 버티던 장관들도 DJ의 뜻이라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국정교과서는 즉각 민영화하기로 했고 주공과 토공도 합치기로 했다. 산업자원부가 반대했던 송유관공사와 지역난방공사까지 민영화 대상에 포함됐다.

7월 3일.

기획예산위는 26개 공기업 모(母)회사 가운데 11곳을 민영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나머지 공기업 모회사와 자회사 55개에 대한 민영화 및 경영혁신안도 7월 30일 언론에 공개된 뒤 8월 4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민영화 청사진이 나오자 노동계가 들고 일어났다.

사실 당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동계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해 6월 55개 기업과 5개 은행이 전격 퇴출되고 실업자가 1백50만명을 넘어서고 있는 데도 양대 노총 지도부는 정부에 끌려만 다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마당에 6월 3일 출범한 제2기 노사정위에서 충분히 논의하지도 않은 공기업 민영화안이 덜컥 발표되자 양대 노총 지도부가 발끈했다.

급기야 7월 10일 한국노총의 박인상 위원장과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은 노사정위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한다.

12일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를 연 양대 노총은 14·15일 잇따라 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DJ는 강경했다.

"정부는 노사 어느 편도 들지 않겠지만 굴복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10일 제2차 무역·투자진흥대책회의)

"노동자만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정부도 할 만큼 했다."(14일 국무회의)

평행선을 달리던 정부와 노동계는 23일 제2차 총파업 직전 극적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를 포함한 구조조정안을 앞으로 노사정위에서 충분히 논의하겠다고 한 걸음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그해 7월 27일 양대 노총이 노사정위에 복귀함으로써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노동계 반발은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한다.

그러나 이때 촉발된 노동계 파업은 8월 이후 현대자동차·만도기계·9개 은행 파업사태로 번지며 DJ 정권 출범 후 최대의 노동계 저항으로 이어진다.

후에 공기업 민영화의 발목을 잡는 조폐공사 파업사태가 벌어진 것도 이 때다.

98년 9~12월 수차례 벌어진 조폐공사 파업은 노조가 기획예산위와 경영진의 구조조정 압박에 반발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워낙 큰 파업 현장이 많아 조폐공사 파업은 노동계조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99년 1월엔 노조가 파업을 접고 이미 업무에 복귀한 터였다.

잊혀졌던 이 파업은 5개월 뒤인 99년 6월 7일 진형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 폭탄주를 돌리다 "조폐공사 파업은 우리가 유도한 것"이라는 돌출 발언을 하는 바람에 당시 불거졌던 '옷로비 사건'과 맞물려 DJ 정권을 뒤흔드는 '뇌관'이 됐다.

검찰과 특별검사의 수사가 뒤따랐고 강희복 당시 조폐공사 사장(현 세종법무법인 고문)과 진형구 당시 공안부장이 파업유도 혐의로 잇따라 구속됐다.

결과적으론 강희복이 훗날 1심에서 무죄로 풀려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이 사건은 진형구의 실언이 빚은 해프닝으로 매듭됐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 갔다.

잠잠했던 노동계는 벌집을 쑤신 듯 달아올랐고 시민단체도 여기에 가세했다.

20여일의 진통 끝에 99년 6월 30일 DJ가 나서서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뒤에야 노동계의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정부개혁실도 '파업유도 사건'의 직격탄을 맞았다.

박종구 공공관리단장의 회고.

"민영화 청사진을 막 실천에 옮기려 할 때 파업유도 사건이 터졌다. 검찰·특검 수사와 국회 청문회가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자료와 대응 논리를 준비하랴 이리저리 불려다니랴 정신이 없었다."

각 부처와 공기업의 눈치보기는 극에 달했다.

당시 박개성 행정4팀장(현 엘리오 앤 컴퍼니 대표)의 회고.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장관이나 공기업 사장들도 몸을 사렸다. 노조에 잘못 보였다간 큰코 다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아무리 채근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치권까지 딴죽을 걸었다.

그해 10월 열린 국회 산업자원위에선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민영화를 반대했다. 그 결과는 민영화의 후퇴로 이어졌다.

한국전력 민영화를 맡은 산자부는 한전 발전부문을 2000년 1월까지 6개 자회사로 떼어낸 뒤 이 중 1개사를 매각하는 내용의 전력산업구조개편법과 전기사업법을 99년 12월 국회 산자위에 올렸다.

여당 의원들까지 딴죽

그러나 이듬해 총선을 앞둔 산자위 소속 의원들은 공기업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이를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한전 민영화법은 본회의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자동폐기 된다. 이 법안은 1년 뒤에야 국회를 통과했고, 지금까지 발전노조의 파업이 되풀이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가스공사 민영화 방안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는다.

당초 산자부는 가스공사에서 3개의 자회사를 분리한 뒤 이를 2001년까지 모두 팔기로 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제동과 노조 반발로 가스공사 민영화는 아직 관련법 개정조차 못하고 있다.

이렇게 삐그덕대던 공기업 민영화는 한국중공업 파업사태에서 또 한차례 곡절을 겪는다.

99년 11월 10일.

삼성·현대·한중 3사가 발전설비 및 선박용 엔진 사업부문을 한중으로 합친다는 '빅딜' 합의를 발표했다.

한중 노조는 이를 '민영화를 위한 각본'이라며 무기한 파업으로 맞선다.

이 무렵 한국을 방문한 잭 웰치 제너럴 일렉트릭(GE)사 회장이 당시 한중 민영화를 총괄한 정덕구 산자부 장관(현 서울대 국제금융연구센터소장)과 만나 '한중 민영화에 참여한다'고 합의한 사실이 알려진 것도 노조를 자극했다.

한중의 파업은 세밑까지 계속됐다.

연말이 가까워 오자 한중의 최대 거래처인 GE가 발전설비 주문을 취소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당시 한중은 GE에 하청계약은 물론 기술까지 의존하고 있어 GE가 떠나면 미래가 불투명해질 상황이었다.

파업 44일째인 12월 23일.

노심초사하고 있던 정덕구에게 DJ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중 노사의 협상 전망은 어떻소?"

"어렵습니다만 해를 넘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연말을 넘기지 않도록 하시오."

정덕구의 회고.

"대통령의 지시는 단호했다.다른 부문에 비해 공공개혁이 부진하다는 비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밀려서는 안된다는 절박감이 배어 있었다."

DJ의 의중을 읽은 정덕구는 이튿날 노동부·경찰청 등 관계부처 차관들을 소집해 파업 분쇄 작전을 짠다.

경찰 병력을 정문 앞까지 진출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게 하는 한편 종교계와 노동계 인사를 동원해 온건파 노조원들을 회유했다.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 GE가 발주한 발전설비를 공장 밖으로 내가려던 비노조원 20여명과 노조측 사수대가 충돌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노조 지도부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지자 노조는 결국 12월 27일 협상 테이블로 나와 민영화 동의서에 서명한다. 하마터면 꺼질 뻔했던 공기업 민영화의 불씨는 이렇게 되살아났다.

다음편 '정리해고와 현대차 파업'은 8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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