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해야 美國 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의 말은 백번 옳다. 미국은 한국의 지도자가 바뀌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를 예의주시한다. 북한에 대한 생각이 미국 정부의 그것과 많이 다르고, 주한미군의 문제에 지금까지의 어느 대통령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보이면 대비하기 위해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은 4강의 이해가 마주치고 자주 충돌하는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시아에 중요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남북한이 긴장관계를 계속하느냐, 화해하고 협력하느냐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가는 미국에 초미의 관심사다. 관심과 불안은 다르다.

盧후보는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꼭 미국에 신고하러 가야 하느냐고 자문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볼 일 있으면 간다. 볼 일 없어도 한가하면 간다… 다만 국내정치용으로 사진 찍기 위해 가지는 않겠다."

盧후보의 말 무거워야

盧후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미국은 국제정치의 중심이다. 볼 일 없어도 미국에 가고, 한가하지 않아도 시간을 내서 가는 게 좋다고. 미국 정치인·관리들과 사진 안찍어도 그들에게서 들을 말도 많고 그들에게 해줄 말도 많다.

盧후보는 일생에 해외여행을 세번 했다고 한다. 미국은 가지 않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경우와 비슷하다.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해외여행이라고는 중국에 한번, 멕시코에 세번 갔다. 그나마 중국은 아버지 부시가 대사로 있을 때 부모 만나러 갔고, 텍사스 사람들에게 멕시코는 외국같지 않은 이웃이다.

그래서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국제감각이 너무 빈약해서 부시 정부의 외교가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9·11 테러가 일어나 부시를 하루 아침에 외교적으로 성장시켰다. 그래서 그는 외교적 색맹을 면했다.

盧후보의 문제는 그가 미국을 방문한 일이 없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선에서 인기상품으로 삼겠다는 인상을 주는 데 있다. "볼 일 없어도 한가하면 간다"는 표현에 묻어나는 반발심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임있는 대선후보에게 적절한 말은 아니다.

4월 11일 이 자리에 실린 '노무현에 놀란 미국'이라는 칼럼을 읽은 많은 盧후보 지지자들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가서 낙점을 받아오라는 말이냐고 공격을 해왔다. 워싱턴에 가서 낙점 받고 사진 찍어 오라는 게 아니다. 그들의 한국관과 북한관을 듣고, 그들에게 한·미동맹에 관한 盧후보의 생각을 말해주라는 것이다.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의 진원지에 가서 미국이 정치·경제·군사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어떻게 21세기의 세계를 요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대통령 후보로서, 또는 대통령이 된다면 대통령으로서 비전을 세우고 정책을 다듬으라는 주문이다. 월 스트리트에 가서 한국 경제가 실질적으로 누구의 손에 어떻게 움직여지고 있는가를 실감하라는 것이다.

과거 발언도 해명·설명을

盧후보는 이제 보통 정치인도 경선후보도 아니다. 그는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재벌들의 주식을 정부가 사서 노동자·농민·도시서민들에게 나눠주자든가(88년 국회 대정부질문) 특정신문의 폐간을 고려한다는 발언(2001년)은 너무 가볍게 들린다.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말부터 무거워야겠다.

9·11 테러가 없었다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념적 좌표(스펙트럼)에서 우(右)에서 중도쪽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노무현 후보는 어떤가. 노동자·농민·도시서민을 특권계급의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시키자고 외치는 운동권식 언행으로 유권자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盧후보는 장(場)의 논리를 가지고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지금부터 과거의 발언 하나 하나를 해명하고 설명하고 확인해 나가야 한다. 국민은 그가 앞으로도 그 장의 논리로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싶다. 개혁적인 盧후보에게 김영삼·김대중은 극복의 대상인지, 포용할 대상인지도 장의 논리로 설명되는지 묻고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