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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는 재미까지 빼앗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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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누가 나에게 미국 사회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성숙한 언론의 자유를 들고 싶다.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이제 너무 무르익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 된 것 같다. 예컨대 부시 대통령의 경우 얼마나 많은 언론이 선거전에서 그의 실패를 점치고, 그가 재선되면 나라에 재앙이 쏟아질 듯 말했던가. 현재 부시는 집권 제2기를 힘차게 시작하려 하고 있지만 '언론 길들이기' 같은 조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한 달 전쯤 LA 연설에서, 백악관에서 극단적인 언론을 그냥 놓아두기에 자기가 나서서 한번 짚어주려 했다고 말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언론과 정부의 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는 경제 부문의 자유경쟁.자유방임의 원칙을 언론에서도 철저히 지키면서 누구나 말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읽고 싶은 것을 읽도록 놓아둔다. 미국에는 어떤 신문을 좋다 나쁘다로 편 가르는 시민단체도 없고, 거기에 편승해 구독률 제한이나 중과세로 국민의 읽을 권리마저 간섭하려 드는 정치인도 없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초기의 이민들은 시민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크롬웰이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을 보았다. 이 경험으로 그들은 시민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독재정권이 수립될 수 있다는 위험을 일찍이 깨달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삼권분립과 언론의 자유였다.

1732년에 일어난 젱어(Zenger) 사건은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를 확립한 첫 사건으로 기록된다. 뉴욕의 한 신문이 주(州) 지사를 비난하는 기사를 싣자 주 의회가 편집인 젱어를 체포.구금했다. 그러나 재판에서 변호사와 배심원의 활약으로 젱어는 무죄 석방됐다. 40년 후 언론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나란히 헌법 수정조항 제1조에 올려져 미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초석이 됐다.

미국도 중과세로 기업을 분쇄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국민에게 백해무익했던 마피아에 대해서였다. 많은 국민이 애독하는 신문을 독점 기업이라는 논리로 몰아가며 판매부수 제한이나 중과세하려는 처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유례가 없다. 만일 정부가 이런 규제의 칼날을 들이댔다면 오늘날 뉴욕 타임스.CNN.르몽드.아사히 같은 세계의 유명 신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제화 시대의 우리 미디어도 국내외 큰 사건에 대해 몇몇 세계적 신문의 입장을 살펴본다. 우리 언론도 국제적 위상을 갖추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성장을 막으려 하니 애석하다는 느낌이다. 메이저 신문들도 한동안 자전거 선심 등 과다한 판매 경쟁으로 국민의 빈축을 산 적이 있었으나 요즈음은 나아졌다. 그래서 나같이 조간 신문 읽기를 일상의 조그만 즐거움으로 여기는 평범한 시민들은 언론 규제 움직임에 대해 박탈감을 느낀다. 나아가 그것의 저변에는 다른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오랫동안 일부 시민단체가 끈질기게 벌인 특정 신문 안 보기 운동에도 불구하고 3대 신문의 구독률이 일반 종합신문 시장에서 60%가 넘는다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국민이 그 신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다. 신문은 인터넷이나 TV 뉴스같이 시간.공간.연령의 제한성을 뛰어넘어 언제 어느 곳에서나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교양을 함양해주고 심심한 시간을 메워주는 좋은 벗이다. 이를테면 서민 음식점이나 점포.사무실 등도 고객 접대용으로 대개 3대 신문을 제공한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가뜩이나 요즈음 서민 경제는 썰렁하다 못해 서늘하다. 그런데 국민의 읽는 재미마저 없애버리고 규제하려 든다면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형인 한국외대 교수.미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