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 졸인 90분 … 미친 듯 즐긴 월드컵 … 그리고, 16강의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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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열린 23일 새벽 온 국민은 한마음으로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원했다. 반포 플로팅 아일랜드 앞 한강공원에서 붉은 옷을 입고 밤샘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서울 여의도 너른들판에서 열린 거리 응원전에 참가한 여성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경기 상황만큼 다양한 표정으로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뉴시스]

새벽 시간대에 열린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58곳의 거리 응원장에 50만1800여 명(경찰 추산)의 시민이 집결했다. 시민들은 2002년 이후 8년 만에 찾아온 16강이라는 큰 선물을 마음껏 즐겼다.

경기 직후 서울광장에서 만난 미국인 데이비드 터너(32)는 “한국 사람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월드컵을 즐겼다. 한국은 정말 놀라운 나라다”고 말했다. 한국에 10년째 거주하고 있는 이란인 아칸(28)도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자랑이다. 함께 이 기쁨을 즐기고 싶다”고 축하해줬다.

트위터·미투데이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경기 도중, 경기가 끝난 후에도 실시간 소통을 이끌어 가며 또 하나의 축제의 장을 펼쳤다. 특히 거리 응원에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은 트위터 등에 실시간으로 경기 소감을 올리며 한마음으로 한국팀을 응원했다. 선수들에 대한 기발한 패러디도 빠르게 퍼졌다. 이정수 선수의 슈팅 장면 캡처 화면은 ‘동방예의지국의 슛’이라는 제목으로 퍼져 나갔다. 이 선수는 기성용 선수의 프리킥으로 크로스된 볼을 슈팅하는 순간 머리와 다리를 동시에 움직여 해설자마저 헷갈리게 했다. 캡처 화면엔 ‘슈팅 순간 머리를 숙인 이 선수의 자세는 상대편 골키퍼에게 골을 넣게 돼 미안하다는 인사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 붙었다. 이 선수에겐 ‘헤발(헤딩+발) 이정수’라는 애칭이 붙었다.

나이지리아 선수가 차두리 선수의 마크를 따돌리고 선제골을 넣자 ‘차두리 로봇설’ 패러디 시리즈가 나왔다. “차범근 해설위원이 경기를 보느라 잠시 조종하는 걸 잊었다”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차 위원이 아들 차두리 선수가 공을 잡으면 잠시 말을 안 하는 장면에 대해 “조이스틱으로 차두리 로봇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유머가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었다.

방송인 최화정씨는 이날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면 비키니를 입고 라디오를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이날 정오에 시작한 ‘최화정의 파워타임’ 오프닝 1분간 하늘색 비키니를 입은 채로 방송했다. “16강에 진출하면 30년간 기른 콧수염을 깎겠다”고 약속했던 가수 김흥국씨도 이날 약속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비키니를 입고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최화정씨.

태극전사 가족들의 미니 홈페이지에도 네티즌의 축하와 응원의 글이 쏟아졌다. 지난 18일 득남한 골키퍼 정성룡 선수의 부인인 미스코리아 출신 임미정씨 미니홈피에는 이날 오후 5시까지 약 2만여 명이 다녀갔다. 이날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선수들에 대한 네티즌의 배려도 돋보였다. 이동국 선수의 부인 이수진씨의 미니홈피에 네티즌 약 8000여 명이 몰려 ‘당신은 영원한 우리의 국가대표입니다’는 글을 남겼다.

◆월드컵 불상사도 벌어져=16강 진출에 흥분한 20대 청년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3일 오전 6시30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부근에서 대학생 이모(20)씨가 16강 진출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대학 선·후배 3명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한강경찰대는 15분 만에 이씨를 구조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씨는 결국 숨졌다.

경기 후반 실책으로 상대에게 페널티킥을 허용한 김남일 선수에게 일부 네티즌이 악의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김 선수의 부인인 김보민 KBS 아나운서의 미니홈피엔 이날 하루 약 45만 명(오후 5시 기준)의 방문자가 다녀갔다. 이 중 일부는 “진공청소기가 고장 났나” “은퇴하라” 등 김 선수를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그러나 대다수 네티즌은 “아무리 실수를 했어도 따뜻하게 안아주고 격려해야 한다”며 김 선수를 응원했다.

송지혜·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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