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48년 苦樂 함께 공동체정신 훼손 아쉬워" : 한국 선교생활 마감 나길모 주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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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오는 25일 은퇴하는 인천대교구의 나길모(75·본명 윌리엄 J 맥노턴·사진)주교의 심성은 어린이를 대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최근 인천시 답동의 인천교구 주교관을 찾았을 때 그는 부설유치원의 아이 1백50여명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를 만나자마자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셋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반색하며 악수를 한번 더 청했다.

"'생명개방'이 중요합니다. 'Open to life'를 해야 한다는 말이죠. 한국인들, 낙태나 불임시술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품게 되면 장애인 사랑이나 노인 사랑은 절로 일어나죠."

그러면서 나주교는 자식을 하나만 둔 젊은 부부를 만나면 "아이 하나 더 낳으세요"라고 덕담을 한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어 나주교의 가족 이야기로 넘어갔다. 5남매 모두가 연년생으로, 장남인 나주교와 막내의 나이 차이가 겨우 5년 3개월이라고 한다.

바로 밑의 여동생이 나주교를 대신해 부모님을 모시느라 독신으로 살았고, 다른 형제 셋이 아들딸을 열다섯이나 뒀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우리를 키우면서 너희들 때문에 내가 고생 많이 했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 어머니가 1976년 한국에 처음 오셔서 '아이구! 괜한 걱정을 했구나'라면서 마음을 놓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음달 고향인 미국 보스턴 인근의 메수엔이라는 작은 마을로 돌아가는 나주교가 48년 한국생활 끝에 챙겨갈 짐이 궁금했다.

그는 "별로 없어요. 항공기 수화물로 다 실을 만큼 단출해요"라고 대답했다. 순명과 청빈의 삶이 몸에 밴 그는 지금도 한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나들이할 때는 운동도 할 겸 전철과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인천교구내 신부님들, 지도자들, 평신도들 정말 일 많이 했어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서운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다 예정된 일인걸요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1964년에 아버님께서 별세하셨을 때 많은 신자가 기도로, 편지로 위로해준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주교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대목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다"(요한1서 4장 10절)이다.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부부가 사랑하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하느님의 얼굴을 할 때 이 세상은 크게 달라집니다."

경기도 장호원에서 사제 일을 시작한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 현대사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손님을 환대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아프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마을이 모두 나서서 도와주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다른 것은 그런대로 내려오는데 아파트가 숲을 이루면서 공동체 정신이 많이 훼손된 것이 안타까워요."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2년 정도 뉴욕의 메리놀 외방선교회 본부의 일을 돕다가 다시 한국을 오가며 피정 프로그램 등에서 강연을 할 계획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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