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콩 달 콩 '사랑 폭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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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아이언 팜(Iron Palm)' 은 제목부터 수수께끼 같다. 풀어 쓰면 강철 손바닥이다. 무협소설의 철사장(鐵沙掌)을 영어로 옮긴 게 아이언 팜이다. 뜨거운 모래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며 손을 무쇠처럼 단련하는 수련법을 가리킨다.

영화에선 모래가 전기 밥솥으로 돌변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속으로 괴성을 지르며 손을 찔러대는 아이언 팜(차인표)을 보면 폭소가 터진다. '귀공자' 차인표의 황당한 변신이다. 5년 전 헤어진 애인 지니(김윤진)를 찾아 서울발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무작정 올라탄 그의 저돌성이 익살스럽다. 밥솥이란 '특이한' 소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이언 팜'은 코미디다. 최근 기세등등하게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코미디 열풍에 한몫 거든다. 그런데 조폭·양아치·경찰 등을 희화화한 요즘의 주류 코미디와 색깔이 다르다.

할리우드의 '대표 선수'인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남녀 간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를 전달하는 것.

로맨틱 코미디는 국내에서 그리 성공한 장르는 아니다. '결혼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신부'등 몇몇 작품이 꼽힌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갈등과 해후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 '아이언 팜'은 로맨틱 코미디의 본산인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겼다. 미국에서 공부한 육상효 감독의 이력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한국적이다. 로스앤젤레스라는 배경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한인 타운이 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이언 팜'은 경쾌하다. '깊고 푸른 밤''웨스턴 애비뉴'처럼 아메리칸 드림 앞에서 좌절하는 동포들이 거의 없다. 미국 사회에서 떠도는 소수 민족으로서의 중압감에서 해방된 분위기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핵은 상반된 캐릭터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이다. 물론 중심 축은 아이언 팜(한국명 최경달)과 지니다. "한국이 해준 게 하나도 없다"며 미국으로 날아가 술집에서 일하는 지니와 그를 잊지 못해 5년간 죽기 살기로 영어를 공부해 태평양을 횡단한 아이언 팜의 '기막힌' 사연을 낚아챈다.

육감독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추가했다. 옛 여인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언 팜과 미국에서 성공한 신자유주의 사상의 마케팅 전문가 애드머럴(찰리 천)을 대립시키는 것. '순정파' 아이언 팜과 '실리파' 애드머럴이 지니를 사로잡으려는 쟁탈전을 벌인다. 월·수·금은 아이언 팜이, 화·목·토는 애드머럴이 지니와 함께 지낸다는 '신사협정'이 깜찍하다. 여성이 그만큼 세진 것일까.

아이언 팜과 한인 택시 운전사 동석(박광정)의 관계도 잔재미를 배가한다. 표적을 향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아이언 팜과 "미국은 여자들의 용광로"라고 주장하는 동석의 대치도 볼 만하다.

육감독은 이런 얼개 속에 아기자기한 장치를 심어놓았다. 특히 언어를 통한 캐릭터 노출이 신선하다. 한국을 떠난 뒤 '짧은' 영어만을 고집하는 아이언 팜,미국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지니, 미국인과 전혀 다름이 없는 애드머럴, '콩글리시' 스타일의 엉터리 영어를 쓰는 동석은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의 축소판에 해당한다. 말장난을 일삼는 요즘 코미디의 썰렁한 유머보다 한 등급 위인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지니에 대한 사랑이 좌절되자 만취한 상태에서 횡설수설 한국어를 늘어놓는 차인표에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아이언 팜'은 기대만큼 치밀하지 않다. 순간의 폭소와 전체의 미소가 매끄럽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때론 실소가 나온다. 신자유주의자 애드머럴도 다른 캐릭터에 비해 튀는 게 사실이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등장인물과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이란 배경의 연결도 성긴 편이다. 공간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좀더 분명한 설명이 뒤따랐다면 개별 인물의 행동이 더욱 개연성 있게 살아났을 법하다.

영화에선 소주가 빈번하게 나온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소주를 먹고 싶게 하는 영화라면 '아이언 팜'의 바텐더 김윤진은 소주를 정말 맛있게 마신다. 이것도 한국적 코미디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15세 이상 관람가. 19일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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