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9>제101화우리서로 섬기며살자 : 18.가난했던 어린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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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내가 광복을 맞은 것은 열한 살 때였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된 상태에 태어났으니 유년시절이 즐거울 리 없었다. 가난과 암담한 미래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1934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김순필씨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마흔둘이었기 때문에 나는 큰 형수의 젖을 먹고 자랐다. 게다가 열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 형님 부부는 부모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내 위로 다섯을 잃었기 때문에 석달을 기다렸다가 나를 호적에 올렸다. 일곱 식구가 작은 방에서 함께 자다보니 어머니는 내가 형들에게 깔리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벽쪽에 재웠다고 한다. 지금 내 머리 한쪽이 평평한 것은 그때 벽을 등지고 칼잠을 잤기 때문이다.

광복후 선생님이 한국인으로 바뀌었지만 내겐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그때도 치맛바람은 거셌다. 어머니가 학교를 찾지 않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에 들지 못했다. 돈 많은 집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는데 선생님은 늘 그 아이들을 편애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웅변을 좋아했고 또 잘 했으나 대회에 나가는 쪽은 늘 그런 아이들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집 뒷산에 올라가 혼자 웅변을 하면서 분을 삭이곤 했다.

철없게도 그때 나는 학교에서 느낀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막내아들이 기 죽는 게 싫었던지 언젠가 어머니도 마늘 한 접을 싸들고 나를 따라 나서는 게 아닌가. 나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른 엄마들은 쌀이나 돈을 갖다 주는데 창피하게 마늘이 뭐예요!엄만 학교 오지 마세요."

어머니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으나 달리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 날을 떠올리면 후회가 막급하다.

세상은 달라져도 가난은 여전했다. 봄철이면 우리 가족은 푸른 보리를 잘라 온돌방에 널어 말린 뒤 그것을 끓여 고추장을 곁들여 먹었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진학이 큰 걱정이었다. 수입이라고는 어머니가 일구던 쬐그만 밭에서 나는 소출과 큰 형님이 우마차를 끌어서 벌어들이는 것이 전부였으니 중학교 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틈만 나면 어머니에게 중학교 보내달라고 졸랐다. 일단 시험을 쳐보라는 어머니 말에 힘을 얻어 열심히 공부해 6년제인 수원농림중학교에 합격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터라 나는 성격이 매우 밝았다. 얼굴이 동그랗고 귀엽다고 친구들이 나를 '앵두'라고 불렀는데 나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았다.

수원농림학교 때는 야구부에 들어가 볼보이를 열심히 했다. 그때 야구부 1루수가 최종현 SK 전회장이다. 동생인 최종관씨 역시 나의 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이다. 월사금 내는 일만 없다면 학교생활은 대만족이었다.

학교 갔다오면 한가롭게 놀 시간이 없었다. 집안 일도 돕고 소꼴도 먹이고 밭일을 돕느라 공부를 열심히 하긴 힘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광교산으로 나무를 하러가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생각이 무척 많아졌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월사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과연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암담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하는 길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부를 해서 정치가나 농림부 장관이 되어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자는 결심을 했다. 그렇지만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죽음은 가난이 뭔지를 처절하게 느끼게 했다. 8촌형이 선산을 내주지 않아 아버지를 모실 터가 없어 고민하느라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어느 이웃이 자신의 땅을 내주지 않았다면, 그 때 어떻게 처리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쫙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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