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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기자의 ‘남아공 리포트’- 간디 손녀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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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2일(이하 현지 시간)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열린 남아공 동부의 더반은 인도인이 몰려 사는 곳이다. 인도인들은 1860년대 인도와 남아공을 지배한 영국인들의 계약직 노동자(indentured servant)로 남아공에 들어왔다. 현재 남아공 인구의 3%(150만 명)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 독립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도 더반에서 20년을 살았다. 24세(1893년)부터 45세(1914년)까지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남아공에 첫 직장을 얻었던 간디는 기차 1등석에 탔다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비폭력 인종차별 투쟁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를 주도했다. 인도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적 뿌리는 남아공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간디의 손녀 엘라 간디(70·사진)는 지금도 더반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던 그는 1973~81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 94년부터 2003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21일 더반 시내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엘라 간디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마하트마 간디가 남아공에서 활동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남아공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부당한 일들을 당하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남아공 인도인 최초의 정치단체 ‘나탈 인도인 회의’도 만들었다. 간디의 사상은 남아공에서 태동한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7살 때 인도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갔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앞둔 시점이어서 할아버지는 매우 바빴다. 하지만 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할아버지가 검소한 삶을 강조하기에 나는 ‘남아공에서 호박을 주로 먹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의회에 가서 ‘내가 말하는 검소한 삶은 호박만 먹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고 연설했다.”

-간디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뭔가.

“할아버지가 내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항상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고 힘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해라’. 내가 전 세계 정치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한국과의 인연은.

“안타깝게도 한국과는 교류의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현재 ‘간디발전재단(Gandhi Development Trust)’과 ‘세계종교평화회의(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의 명예 고문으로 있다. 앞으로 교류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말미 기자는 “더반에서 나이지리아와 시합하는 한국팀을 응원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월드컵은 세계가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지 싸워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머쓱해하는 기자에게 그는 “한국팀의 승리가 한국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면 기꺼이 한국을 응원하겠다”며 웃었다.

박성우 기자

◆엘라 간디=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네 아들 중 차남인 마닐랄의 1남2녀 중 차녀다. 아버지 마닐랄(1892~1956)은 1917년 더반에 정착해 구자라트어(語) 영어 주간지 ‘인디언 오피니언’을 창간했다. 엘라의 오빠 아룬(1936~ )은 1987년 미국으로 이주해 ‘간디 비폭력 연구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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