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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흐드러진 봄·봄·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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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도시에 살아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길가의 은행잎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색상을 바꿔가고 라일락의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이맘때가 봄의 절정이다. 야외로 나들이하기에도 좋은 때지만 조금 문화적으로 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미술속의 봄, 화랑에 만발한 봄이야기를 만나러 가자는 제안이다.

그런 점에선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열리고 있는'千變萬花(천변만화)-봄이야기'전이 제격이다(28일까지).

계절을 예찬한 곱고 아름다운 작품만 기대하지는 마시라. 그런 구상 작품 뿐 아니라 추상 작품도 많다. 봄꽃을 그려도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화사함에 대한 예찬,인생을 관조하는 잔잔함, 위험한 유혹이라는 경고 등 작가마다 다양한 의미를 담았다.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봄이나 꽃에 관한 나름의 이야기라는 점이라고 할까. 전시장에선 작고·원로 작가에서 30대 신진작가에 이르는 18명의 회화·조각·디지털·설치 60여점이 관객을 맞고있다.

전시는 '산천의 봄/세상의 봄''심상(心想)의 봄''천변만화―꽃이야기'의 3부분으로 나눠 열린다. 제1전시장 '산천의 봄/세상의 봄'전은 김병기·김환기·도상봉·박고석·박수근·장욱진 등 작고·원로작가들의 구상(具象)작품들로 꾸며졌다. 김환기의 유화 '항아리'는 부드러운 색감이 절로 봄을 느끼게 한다. 백자 항아리와 앵도같은 색점들이 어울려 눈웃음 치는 여인 처럼 보이는 귀여운 작품이다. 봄의 얼굴이라고 할까.

제2전시장 '심상의 봄'전은 추상이다. 노랑과 파랑,연두와 주황의 색면이 파스텔톤으로 어우러진 곽인식씨의'무제'는 그대로 봄빛의 향연이다. 정종미씨의 한국화 '봄'은 천연염료로 물들인 연두색과 황토색이 시골의 보리밭과 흙담을 연상케 한다.

제3전시장 '천변만화-꽃이야기'전은 꽃을 소재로 한 그림·조각·설치를 보여준다.

고영훈씨의 아크릴화 '유혹'은 낡은 책위에 빨갛고 노란 꽃들을 극사실적으로 올려놓아 화원을 놔두고 골방에 박혀있는 게 아니냐는 유혹을 말하고 있다.

설악산 화가 김종학씨의'진달래''개나리'는 강렬하게 흐드러진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원로 이대원씨의 '농원'은 화려한 원색이 물결치며 관객을 압도한다. 양만기씨의 디지털 회화'다윈의 정원'연작이나 정광호씨의 철사로 만든 꽃잎, 홍장오씨의 유리로 만든 꽃 등도 눈길을 끈다.

작가 노트들도 재미있다. "나는 자연과 사랑을 한다.아니 연애를 한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화가의 숙명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김종학).

"지금까지는 무겁고 철학적인 것만 그렸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게 꼭 심오해야 할까. 보는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한다면 더욱 좋은 게 아닌가. 꽃을 그리면서 나 역시도 밝은 마음이 들어 좋다"(고영훈). 화가들의 그런 마음으로 각자의 봄을 붙잡아 놓은 현장이 이번 전시회다.

조현욱 기자

"바람 불고 비 내린 가지에/바람 비 서리 눈 다시 몰아쳐/바람 비 서리 눈 모두 지난 뒤에/한 나무 꽃 피우리니/하루에 한꽃 피고/이틀에 두꽃 피어/삼백 예순날 삼백 예순 꽃 피니/한몸이 온통 꽃이요/세상이 온통 봄이로다"

(진산의 소설'홍엽만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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