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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논의된 일" 불 국 사 "원칙 무시한 편법 발상" 반대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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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서울에 흙비가 내리던 지난 12일, 경주는 화창했다. 여느 봄날과 다름없이 학생들이 줄을 이어 밀려드는 문화유산 1번지인 토함산 석굴암. 확성기를 타고 울리는 높은 목소리들이 성소(聖所)를 찾은 관람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불국사가 부속암자인 석굴암을 복제한 실물크기 모형관을 현재의 석굴암 바로 아래쪽에 짓겠다고 하자 이를 둘러싼 시비가 터져나온 것이 지난달 초. 논란이 확산되자 관계당국인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이날 찬반론자들을 모아 현장설명회를 연 것이다. 문화예술계와 환경운동관계 인사 1백여명과 회색 승복의 불국사 스님들, 그리고 큰소리에 몰려든 일반 관람객들까지 어울려 마당이 어수선했다. 먼저 불국사 주지 성타 스님이 인사말에서 '모형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보존 차원에서 유리벽을 설치해 관람객들이 직접 들어가지 못하자 오래 전부터 제2 석굴암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지금까지 여건이 안맞아 성사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여러분의 뜻을 모아 그간의 아쉬움을 해결코자 합니다."

1976년 유리벽을 설치한 이래 '제2 석굴암' 건립은 불국사의 숙원사업이었으며, 오랜 검토 끝에 석굴암 아래쪽이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얘기다. 이어지는 문화재청 전문위원, 설계를 맡은 김홍식(명지대)교수의 설명까지는 모두 '모형관 건립'을 추진하는 쪽의 입장이었다.

이들은 반대론자들이 주장해온 '문화재 주변 환경 훼손'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반박했다. 즉 "제2 석굴암인 모형관을 진짜 석굴암 근처에 지어야 관람객들이 편하고, 관리하기도 좋다" "석굴암 입구 주차장 등 좀 떨어진 곳에 짓는다 해도 자연환경을 훼손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지형상 오히려 환경훼손이 더 심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질의응답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주환경운동연합의 이재근씨가 마이크를 잡자 목소리를 높였다. "석굴암이 중요한지는 누구나 압니다. 누구나 아끼는 석굴암 문제이고, 또 국민의 혈세 52억원이 들어가는 일인데 왜 그동안 공개적인 논의가 없었습니까. 공청회를 열어야 합니다."

문화재청 관계자의 설명이 있었으나 분위기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문화재청 관계자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의 심의를 거쳐) 장소는 결정됐다"고 말하자 당장 감정적인 반응이 터져나왔다. 울산 반구대사랑시민모임 이재호씨는 "참 원통하네요. 장소가 결정됐다니 그럼 여기 모인 사람은 전부 들러리 아입니까. 무조건 백지화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울산역사교사모임 손승호 회장은 "오늘 이 자리에 와보니 사찰과 문화재청에서 밀어붙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행정편의주의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한창 논의가 무르익을 무렵 반대운동을 주도해온 '석굴암·토함산훼손 저지 대책위원회'의 김홍남(이화여대·미술사)교수가 나섰다.

"석굴암은 어디까지나 조용한 암자이며, 석굴암을 만든 신라인도 그런 뜻에서 이런 산꼭대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재는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가 문화유산헌장의 첫째 원칙입니다. 제2 석굴암 건립은 합법일지 모르나 문화재 환경을 파괴하는 편법입니다. 굳이 모형관을 짓겠다면 불국사 경내 어디 다른 곳에 지어야 합니다."

이어 같은 모임의 대표인 이상해(성균관대·건축과)교수도 "훼손이냐 아니냐는 기술적인 문제 이전에 문화재 보존의 원칙과 철학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석굴암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탐욕의 건축물을 세우는 데 반대합니다"고 주장했다.

불국사는 97년부터 제2 석굴암 건립을 추진해왔으며, 지난 1월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는 현재의 석굴암 아래쪽에 모형관을 짓는다는 불국사의 계획을 심의·승인했다. 이에 따라 불국사는 5월 중 모형관 건립의 첫 삽을 뜰 계획이다. 그래서 불국사와 문화재청은 모형관 건립을 서두르고 있으며, 반대론자들 역시 "일단 착공은 막아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성스러워야 할 문화유산 1번지는 화창한 날씨가 무색하게 소란스러웠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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