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손을 움직이면 환상은 현실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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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마술은 관객과 마술사의 두뇌 싸움이다. 마술사는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유도하고, 관객은 그 환상 속 비기(?技)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그 한판 승부는 마술사의 승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상상과 모험으로 가득한 마술의 세계에선 과학의 법칙마저 거부된다. 무협 영화에서나 보던 공간 이동이 이뤄지고, 늘씬한 미녀의 몸이 반으로 댕강 잘렸다가 이내 제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최근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은 신세대 마술사 이은결(22), 그리고 마술을 현대 미술에 과감히 접목한 박혜성(32)씨.이들은 세상을 마술이라는 코드로 읽고 '세계 정복'을 꿈꾼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신비와 상상의 세계엔 국경이 없다"-이들의 주문(呪文)이다.

지난해 8월 19일 일본 나고야시 '월드 매직 콘테스트' 현장.

"1등, 한국의 이은결!" 계속된 심사위원장의 호명에도 이은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함성이 울렸지만 웅웅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던 동료 10여명이 환호와 함께 벌떡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크게 외쳤다.

"드디어 해냈어!"

한국인으로선 세계대회 첫 우승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난 3월 25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SA 매직 챔피언십'에서도 41명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두 메이저급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적인 마술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는 오는 7월부터 내년 초까지 미국·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의 세계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지난 8년의 세월이 꿈만 같습니다. 제가 마술사로 세계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가 마술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지나치게 소극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술 학원을 찾았다. 그러나 한동안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해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런 그에게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로에서 시범공연을 연 그는 열광하는 길거리 관객들을 보면서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다짐했다. "세계 최고의 마술사가 되겠다." 그리고 그때의 소년이 세계가 주목하는 청년 마술사로 성장한 것이다.

파격 속에 꽃핀 마술

홍익대 미대를 나온 박혜성은 '마술인'을 자처하고 있다. 마술을 예술 세계의 '블랙 홀'로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다.

1997년 봄. 회화에서 설치미술로 예술 세계의 울타리를 넓혀온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두터운 벽에 현기증을 느꼈다. 가슴이 턱 막혔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어느날 그녀의 머리를 세차게 때리는 것이 있었다. 어릴 시절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마술이었다.

"그래, 떠나자."

덜렁 마술사가 많다고 들은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에겐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호그와트 마술학교'를 찾아나선 그녀에게 캐나다는 고행의 땅이었다. 토론토에 도착한 그녀는 전화번호부부터 뒤졌다. 그곳에서 '직업=마술사'로 돼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실망스런 답변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데서 알아보라"고 했다.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았다. 한 마술 숍에서 먹고 자다시피하면서 '마술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녀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마술사 매직 마이크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카드·동전 마술 등을 배운 뒤 1년여 만에 귀국했다. 박씨는 "권위주의적 미술에 '똥침'을 놓겠다"고 선언했다. 그야말로 도발적이었다. '비디오 아트'로 전향한 그녀의 작품에선 등장인물들이 건물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등 마술적 이미지가 넘쳤다. 그녀 스스로도 마술을 실연하면서 작품의 일부분이 됐다. 그녀는 98년과 지난해 초 미술과 마술을 결합한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 결과 권위있는 '석남 미술상'까지 받았다.

"제게 마술은 단순한 소재 거리가 아니에요. 저의 예술적 영감 그 자체죠."

그녀는 이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 잡지 '플래시 아트'는 곧 그녀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인류를 관통하는 마술의 이미지로 세계 무대에 뛰어들 겁니다."

마술, 그 험난한 길이여

①마술의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②한번 보여준 마술은 반복하지 않는다 ③연습은 은밀하게 하라 ④마술에는 NG가 없다 ⑤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술사의 수칙 중)

화려한 조명과 무대 의상, 현란한 손놀림과 박수, 그리고 열광. 하지만 그 뒤에는 마술사의 고뇌가 서려 있다.

"마술은 피나는 노력의 결실입니다. 성공 여부는 재능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은결씨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손이 무뎌질 것을 걱정해서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마술엔 실수가 있을 수 없어요. 손이 불에 데었어도 얼굴은 웃고 있어야 돼죠."

마술엔 창조의 고통도 따른다. 이씨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8분간의 레퍼토리를 준비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손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마술은 그가 세계 최초로 응용한 것이다.

창조의 고통을 겪기는 박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마술 소도구와 모든 마술 행위로 새로운 세계를 낳아야 한다. 그러니 온몸이 바스러질 듯한 산고(産苦)를 참아낼 수밖에 없다.

마술은 대중을 향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이씨 마술의 생명력은 독창성에 있다. 그는 큰 키(1m87㎝)를 맘껏 이용해 강한 비트의 음악과 춤을 마술과 결합시켰다. 동작 하나하나를 안무하듯이 묘기를 개발했다.

"마술사는 연기·조명·심리·의상·음악·도구 등에 다 정통해야 합니다."

그가 두달 전부터 케이블 음악 채널 KMTV의 비디오 자키(VJ)를 맡은 것도 '톡톡 튀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다. 마술사의 옷을 입고 사람들 곁으로 바짝 다가서기 위함이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과 꿈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외국처럼 마술사가 대중적인 엔터테이너가 될 수 있을 때 마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박씨도 대중적인 마술을 통해 멀게만 느껴지는 미술을 대중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어차피 미술도 원근법 등 착시현상을 노리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마술의 원리입니다. 영상 매체의 선구자가 마술사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마술과 예술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편견과 권위를 훌훌 털고 '대중 속으로 가자'는 게 이들의 모토였다.

세계로 간다

한·일 월드컵은 이들이 세계를 향해 '마술'을 부릴 좋은 기회다.

이씨는 곧 축구공과 월드컵을 이용한 마술의 개발에 들어간다. 월드컵의 상징과 이념을 마술적 이미지로 탈바꿈시키는 작업도 벌일 예정이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남산타워를 없애는 식의 묘기를 부릴 수 있지만, 보다 독창적이고 세계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순신과 거북선을 등장시키고, 통일과 관련된 이미지를 마술로 연결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일 양국의 유망한 젊은 작가 열한명씩이 오는 5~7월 서울과 도쿄(東京)에서 교환작품전(일레븐 투 일레븐)을 갖는다. 박씨는 이 작품전의 작가로 뽑혔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한국 측 홍보자료에 대표작으로 실렸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하나의 비장의 카드를 준비 중이다. 이르면 내년 중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

이씨와 박씨는 자신들이 만들어낼 '매직이 넘치는 환상의 세계'를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다. 세계를 활동 무대로 노리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을 보면 신비한 마술의 세계가 손 안에 한움큼 잡히는 듯하다.

글=이상복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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