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상업성 뒤섞인 '두 얼굴의 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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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산업은행은 최근 자금거래실 직원이 삼애인더스 해외 전환사채(CB)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증권거래법과 내부 규정을 어겨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문책을 받았다. P이사와 투자금융실 직원 두명은 다른 벤처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산은이 새로운 업무를 하면서 내부 통제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발생한 사건들이다. 경제개발 시대에 해왔던 역할이 약화되자 투자은행처럼 돈벌이를 하기 위해 많은 재량을 준 부서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박찬성 산은 종합기획부장은 "자체 수익력을 확보하려고 돈벌이에 전력투구하는 식으로 부서를 운영하다 생긴 일"이라고 말했다.

◇공공성이냐,상업성이냐=산은의 위기는 정체성의 혼돈에서 비롯된다.

산은은 공공성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정책금융 외에 회사채와 국채 인수, 프로젝트 파이낸싱, 기업 인수·합병(M&A) 등 상업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투자은행 업무를 하나 둘씩 늘렸다.'두 얼굴의 은행'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은 개발시대의 정책금융 업무가 줄어든 반면 조직이 커졌기 때문이다.

산은은 1980년대까지 시중은행 대출금리의 절반 수준으로 정책자금을 공급해왔다. 자금은 국가와 동일한 신용등급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싼 금리로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하거나 산업금융채권을 발행해 조달했으며, 정부 재정자금을 갖다 쓰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정책자금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산업은행과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차이가 좁혀졌다. 올해 산은이 쓰려고 계획한 자금은 13조5천억원. 이중 저리의 정책금융은 5천억원 수준에 불과하고 나머지 기업대출·투자자금 등은 시중은행과 비슷한 조건이다. 산은 대출의 메리트가 줄어든 셈이다.

이 와중에 지점을 36개로 늘렸고 일반 예금을 받는 업무도 추가했다. 시중은행과 경쟁체제에 나서면서 덩치를 키웠다.

때문에 산은으로선 전통적인 기업대출만으로는 규모를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타개책으로 투자은행 업무 등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산은 내부에서조차 "정부에서 예산과 인력을 통제받는 은행이 연봉 수억, 수십억원을 받는 인재도 서슴지 않고 고용하는 투자은행처럼 된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군림하는 산업은행=산은 직원들은 "1년의 절반을 감사·검사를 받으며 보낸다"는 말을 자주 한다. 국회·감사원·재정경제부·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 등이 모두 상전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전이 많다 보니 오히려 효율적인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금감원의 한 임원은 "다른 감독기관도 많아 산은에 대한 종합검사는 한번도 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업은행 역시 과거 정책금융을 집행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고객 위에 군림하는 기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다.최근 물의를 일으킨 투자금융실이 벤처업계의 '큰손' 노릇을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산은이 투자한 벤처기업에 소규모 벤처 투자자금이 몰려드는 상황을 악용한 개인 비리가 이번에 검찰에 적발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산은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높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산은의 낙하산 인사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산은캐피탈 사장은 산은 출신이 매번 뒤를 잇고 있다.최근에는 산은 지분이 6.3%에 불과한 H사에 이사 출신을 보내려다 연임을 시도한 산은 출신 사장의 반발에 부닥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자회사가 인사적체 해소창구로 전락한 셈이다.

총재 자리는 관료 출신이 독식하고 그나마 자주 바뀌는 바람에 정체성 확보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계에서는 정부가 산은 임직원의 의존심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공적자금이 들어간 금융기관에는 경영진에 대해 민·형사 책임까지 물으면서 정부자금을 받아 부실을 메운 산은 경영진에는 문책 이상의 책임추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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