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4>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13) 전두환씨의 부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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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기독교계에서 조찬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다. 그 일로 당시 참석했던 목사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말들이 돌았다.

우리나라에선 목사들이 정치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문홍구 합참의장은 나중에 감옥에서 나와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부목사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의하자 "어떻게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느냐"면서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성경에도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있다. 로마서 13장 1~7절, 베드로전서 2장 13~17절 등에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되어 있다. 위정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이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잘되는 일이므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81년 2월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는 가끔 외국 국빈이 왔을 때 청와대로 초청받았을 뿐 개별적인 만남은 갖지 않았다.

전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1987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수도권이 조금 어려우니 노태우 후보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엔 전대통령이 정권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노후보를 도와달라는 것을 보니 물러나려는 생각이 분명한 것 같아 반가웠다.

그때 나는 야당이 정권을 잡을 만큼 민주주의와 선거 문화가 성숙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만큼 '양키 고 홈'을 외치는 세력을 지원할 의사도 없었다.

전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곰곰 따져 보니 노후보를 지원하는 것이 나라를 돕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연설을 할 수 있도록 국방부장관·내무부장관·경기도지사에게 전화나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전대통령은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 장군을 만나라고 말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새마을연수원이나 중앙정보부 등지에서 강연을 10여년 했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전도할 기회여서 나는 강연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강연을 시작할 때면 나는 이런 전제를 깔았다.

"피곤하면 주무셔도 됩니다. 제가 목사이니만큼 종교 얘기가 나올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해하세요."

내 연설의 결론은 "감사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희생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는데 강연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도를 했고 그것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노후보를 도와달라고 모아놓은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새마을연수원이나 중앙정보부에서 하던 것과 다름없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다"는 말로 시작한 강연에서 노태우라는 이름은 단 한차례도 올리지 않았다. 청중석에서 "목사님은 누구를 찍을 겁니까?"라고 물어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미국이 믿어 주는 후보, 둘째 군대가 믿어 주는 후보, 셋째 북한이 무서워하는 후보, 넷째 가정이 건전한 후보를 찍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말하는 사람이 '노태우 후보'라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대선을 앞두고 그런 식으로 강연을 한 것에 대해 지금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후보보다 노후보를 지원한 것은 우리 민족이 거쳐가야 하는 길이 그래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김영삼씨가 대통령을 하지 않고 바로 김대중씨가 대통령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김대중씨를 받아들일 만한 국민들의 정서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도 햇볕정책에 대한 저항이 많은데, 더 일찍 당선되어 햇볕정책을 펼쳤더라면 저항이 더욱 컸을 것이다.

전대통령은 노후보를 위해 비단 나에게만 부탁한 게 아니라고 알고 있다. 전대통령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단임으로 끝냈다. 그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후보를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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