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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 '유정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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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2002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의 임권택(左) 감독, 배우 안성기(右)씨와 함께한 필자. 안씨는 45년 전 영화 '유정천리'를 만들면서 처음 만났다.

내가 공식적으로 영화제작을 시작한 건 1984년이지만 사실은 스물네살 때인 59년 첫 작품을 했다. 고교 졸업 후 별다른 직업 없이 떠돌던 나는 명동을 주름잡고 있던 이화룡의 수하에 '행동대원'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명동에는 스탠드 바만 99개, 나이트 클럽이 5개였고, 다방도 즐비했다.

나는 '플로리다'라는 나이트 클럽을 맡았다. 나이트 클럽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갓 들어간 내가 70여명이나 되는 다른 조직원을 제치고 '노른자위'를 꿰찬 걸 보면 윗사람들 눈에 든 것 같았다. 내 업무는 속칭'기도'였다. 술주정을 부리거나 손님들 끼리 다투면 조용히 무마하는 일이었다. 그 대가로 나이트클럽은 나에게 월급을 줬고, 나는 조직의 상부에 상납도 했다.

여느 때처럼 플로리다에 출근해 보니 화장실에서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젊은이 두 명이 중년 신사에게 시비를 걸고 있던 것이다. 나는 청년들을 조용히 타일러 -사실은 '협박'이지만- 돌려보냈다. 신사는 권 사장이라 불리는 무역업자로 플로리다의 단골이었다.

그 사건 이후 간혹 용돈도 주면서 챙겨주던 그가 어느 날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돈을 대줄 테니 영화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자네는 눈이 살아 있어 잘할 것 같아. 실패해도 좋으니 한 번 해봐." 1000만원 정도면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때였다. 목돈을 쥘 수도 있고 호기심도 일어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유정천리'였다. 출연진은 김진규.박암.이민자 등 당시로서는 호화 캐스팅이었다. 감독은 남홍일씨였다. 가난 때문에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남자가 부인이 마도로스(외항선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자 출옥 후 아이와 함께 새 삶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통속적인 이야기였다.

마침내 개봉일이 다가왔다. 스카라 극장의 추석 프로로 잡혀 웬만큼 관객이 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개봉 며칠 전 극장에서 "안 되겠다"는 통보가 왔다. "'여인숙'을 걸어야 한다"는 거였다. 반공예술인단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행세를 하며 권세를 뽐내던 임화수가 제작한 영화였다.

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추석 후로 밀렸고 시기를 잘못 탄 영화는 참담한 스코어를 보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 내가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이가 극장 수입을 챙겨 도망쳤다. 그 돈은 고스란히 내 빚으로 떨어졌고 그것을 갚기 위해 한동안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러니 충무로 쪽으로는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런데 인연의 끈이란 참 무섭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권 사장을 따라 정창화 감독 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정 감독은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이라는 코미디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조감독을 하던 이가 바로 임권택이었다. 뒷날 임 감독은 그 무렵의 나를 떠올리면서 "눈에 살기(殺氣)가 돌았다"고 했다. 험한 바닥에서 살아남으려 독기를 내뿜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 '유정천리'에서 아역을 맡은 배우가, 지금도 내가 가장 아끼는 안성기였다. 언젠가는 영화로 돌아갈 팔자라는 조짐이 아니었나 싶다.

내 첫 영화는 무참하게 꺾였지만 주제가는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고추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굽이냐/유정천리 비가 오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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