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자백 수사' 인정치 않은 대법원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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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어제 검사 작성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증거로 사용하려면 서명.날인 등 형식적 표현뿐 아니라 그 내용도 진술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진술 내용을 다투더라도 서명.날인 등이 사실이라면 강요나 고문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하던 종전의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무엇보다 직접심리주의와 구두변론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상의 공판 중심주의를 강조함으로써 피고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증거 찾기가 쉽지 않은 사건 수사에서 피의자를 압박해 자백을 받아내는 것을 최선의 수사기법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조서를 토대로 이뤄지던 형사 재판의 심리 방식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자백에 의존하던 검찰 수사 관행도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로 탈바꿈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검찰은 이번 판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법원이 자백한 경우까지 엄격한 증거를 요구함에 따라 정치인 등의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뇌물이나 정치자금을 수표로 받는 사례가 거의 없는 데다 지금도 기소된 정치인들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기 일쑤인데 어떻게 공소유지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보호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자 검찰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미 김승규 법무부 장관이 '인간을 고려한 수사'를 강조했고, 송광수 검찰총장도 '수사 과정에서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검찰이 설 땅이 없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법원의 판례가 바뀐 이상 검찰은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증거를 찾아내는 과학수사 기법들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현행 수사인력과 체계도 인권 수사에 맞게 전면 개편해야 한다. 과학수사에 필요한 예산이나 장비 확보도 필수적이다.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제의 도입 여부를 포함한 제도적 보완책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