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논쟁의 핵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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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국가관 혹은 사상의 '좌경' 성향을 공박하자 노무현 후보는 자기가 결코 좌경이 아님을 극구 변명하였고, 이회창 후보가 현 정권을 좌파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여당과 정부는 일제히 비난의 포문을 열어 현 정권이 좌파적이 아님을 밝히려 했다. 모두가 좌파로 지목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념의 문제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념 논쟁은 좌경과 우경, 수구와 개혁, 보수와 진보 등의 2분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개념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중국에는 천안문 사건 외에도 국내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는데 상식적으로 그들은 진보세력이지 보수세력이라 할 수 없다.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북의 공산 독재체제에 동조하거나 미화하는 세력을 진보라 하고 그를 비판하는 세력을 보수 혹은 수구라 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

중국 보수가 한국선 진보

즉 중국의 진보는 우리의 보수, 우리의 보수는 중국의 진보가 되는 셈이다. 또 다른 예로 이회창 후보의 '좌경적 정권'론이나 여권의 격렬한 반론을 보면 그들의 시각은 복지정책=좌경이라는 유치한 개념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문명세계에는 모든 복지정책을 무조건 좌경으로 보는 보수나 우익은 없다.

미국에서는 좌익과 우익, 보수와 진보 대신에 보수주의(conservatism)와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2분법을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구분은 정책성향의 차이를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그것들은 자유민주라는 공통의 국가이념에 기초하고 있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들은 자유민주체제를 받들면서 보수와 진보주의가 밧줄과 같이 팽팽히 맞서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팽팽히 맞서지 않으면 밧줄이 늘어지고 밧줄이 늘어지면 진보와 보수는 다같이 힘을 잃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수주의든 자유주의든 어느 한쪽이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점에 관련해 이러한 우화(寓話)가 있다.힘이 약한 수영자가 해안에서 1백m 떨어진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보수주의는 50m 줄을 던지고 나머지 50m는 헤엄쳐 나오라 한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1백m 줄을 던지고 그것을 잡든 말든 또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내빼버린다. 아마도 수영자를 건지는 길은 그 어느 것도 아니고 그 중간의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약 분업을 비롯한 복지정책과 평준화 정책을 이러한 관점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해답은 보수와 진보의 모든 의견을 단상에 올려놓고 논리적 토론과 타협을 통해 당사자들 간의 상호이익 혹은 공동이익이 되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매우 지루하고 답답한 과정이지만 민주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공동이익을 찾아내려면 공동의 입장이 있어야 한다. 그 공동의 입장이란 곧 국가이념을 말함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북의 공산독재체제와 맞서고 있는 상태하에서 자유민주의 국가이념이 안팎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음을 본다. 북으로부터의 도전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내부에서도 국가이념을 멸시하고 북의 공산독재체제에 동조하는 세력이 없지 않다.

국가 이념 입장은 분명히

그렇다면 대통령 지망자들은 우리의 국가이념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자유민주 이외에 어떠한 다른 이념에 입각한 남북통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힐 의무가 있다. '(자기의)입장을 밝히면 남북관계 진전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하여 말을 회피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소신을 의심케 한다. 어차피 북은 우리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터에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할 말을 못한다면 필요하면 우리의 국가이념을 수정할 수도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이념적 태도가 분명치 않으면 이념갈등과 국론분열이 조장되고 북에서 우리의 입장을 오판할 위험도 있다. 지금 어차피 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차제에 대통령 지망자의 국가이념을 철저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편 공통된 국가이념의 바탕 위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정책대결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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