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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가게 1호’ 명예 회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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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진정한 ‘양심가게’가 태어났어요.”

20일 오후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촌마을 입구의 ‘양심가게’. 33㎡ 남짓한 가게에는 음료수·막걸리·간장·세제·빵·라면·치약 등 100여 물품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700∼2000원짜리가 대부분이다. 이 가게는 2005년 5월 마을 구판장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자 박충렬(51) 이장이 주민 불편을 덜기 위해 사비 500만원을 털어 문을 연 가게다.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든 시골에서 수지 타산을 맞추기 쉽지 않아 가게를 할 사람이 없자 고육지책으로 마련한 것이다. 그는 “51가구 136명이 사는 마을에서 장성 읍내를 오가는데 버스비만 왕복 3000원이 든다. 농번기에는 간장 1병, 라면·과자 1∼2개 사러 나갈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2006년 9월 양심가게에 담배자판기와 동전교환기가 설치됐다. [프리랜서 오종찬]

지키는 사람 없이 물건을 가져간 만큼 돈을 놓고 가는 무인 양심가게는 동네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2006년 9∼10월 가게 안에 있던 동전 상자와 담배, 물품 등 200만원 상당이 없어졌다.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했다가 3일 만에 뗐다. 박 이장과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속앓이만 했다. 전국 최초 무인(無人) 가게로 키워온 긍지와 자부심에 상처가 나고, 혹여 마을 인심이 사나워질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박 이장은 “4년 전 사건이 가게 운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후 담배 상자 대신 담배자판기를, 동전을 담아 뒀던 비누상자 자리엔 동전교환기를 갖다 놓았다. ‘흑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24시간 열려 있던 가게는 이젠 밤 10시면 닫는다. 주민들도 동네 사랑방이 된 가게에 자주 나와 술과 음료수를 나눠 마시며 물품 정리며 청소 등 허드렛일을 돕는다.

박 이장은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말했다. 한 달 매상이 150만원, 여름 성수기 때는 200만원까지 팔릴 정도로 정상을 되찾았다. 그는 ‘양심가게’의 자긍심을 강조했다. “수천만원을 줄 테니 마을을 배경으로 대부업 광고를 찍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포기했어요. ‘양심’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죠.”

신용·믿음의 상징인 양심가게의 외상 장부도 더 촘촘해졌다.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없기에 적지 않고 나가도 모를 일이지만 날짜와 이름 옆에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1개 값까지 모두 적혀 있다. ‘요금이 적으면 다음에 올 때 더 넣어 드릴게요’란 글이 휴대전화번호 옆에 쓰여 있었고, ‘오늘 이사온 집, 사이다(대) 1병 2500원’ ‘광주서 왔다가 사갑니다, 대박 나세요’란 기록도 있다.

마을 정자에서 만난 오동규(69)씨는 “이 마을이 400년 됐는데 큰 난리나 강도·화재 한 번 없이 버텨 왔다”며 “처음엔 우리도 놀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을 사람들을 믿고, 우리 모두가 주인이란 생각으로 산다”고 말했다.

장성=유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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