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외국계, 무엇이 다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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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환위기 직후엔 부실채권을 팔 곳이 월가의 투자은행밖에 없다고들 생각했다."

최동수 서울은행 부행장은 1998년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에서 자산유동화팀장으로 일할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부실기업을 사서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키운 다음 팔아 고수익을 올리는 전문투자펀드(PE:Private Equity)가 뭔지도 잘 모르고, 부실자산을 바탕으로 채권(자산유동화증권)을 발행해 기관투자가들에게 파는 제도도 없던 때였다. '부실 솎아내기'가 주임무인 KAMCO가 부실채권을 파는 방법은 골드먼삭스·모건스탠리 등 '너무나' 이름이 알려진 몇몇 투자은행(IB:Investment Bank)에 부실채권을 뭉텅이로 묶어 국제입찰로 파는 것(Bulk Sale)뿐이었다. 그것도 얼마나 많이 남기고 파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얼마나 빨리 팔아 한국의 부실정리 의지를 국제금융시장에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었다.

98년 9월, KAMCO가 처음으로 판 부실채권 상품 KAMCO 98-1의 낙찰자는 골드먼삭스였다. 총 채권원금 2천75억원을 낙찰받은 금액은 2백54억원으로 매각률(매각액/채권원금)은 12.2%.

이때 골드먼삭스가 인수했던 부실채권 중 가장 값 나가는 것은 진로에 대한 부실채권.골드먼삭스측은 정확한 인수 금액을 비밀로 하고 있지만, 관련 업계에선 당시 골드먼삭스가 채권 원금의 24~34% 수준에서 인수한 진로 부실채권 값이 요즘엔 45% 안팎까지 올랐다고 추정한다. 외국계 IB·PE들은 이렇게 손쉽게 한국 구조조정시장에 진출했다.이후 국제입찰을 거듭하며 매각률은 29.4%까지 올라가지만 여전히 값은 매우 쌌다.

이제 와서 헐값 매각 여부를 따지지만,쏟아져나오는 부실채권을 달리 소화할 방법을 몰랐던 당시에는 그게 값이었다.

골드먼삭스와 함께 일찍이 한국에 진출했던 미국계 론스타도 그간 많은 부실채권·부동산을 인수했다.

99년 5월, 역시 KAMCO가 뭉텅이로 판 부실채권 중 무학건설에 대한 부실채권을 70여억원에 인수해 2년이 채 안된 지난해 4월에 84억원을 상환받았고, 지난해 5월에는 6천6백32억원을 들여 한국 최대의 빌딩인 스타타워(서울 역삼동,연건평 6만4천평)의 주인이 됐다. 최동수 부행장이 부실채권을 외국계에 그저 뭉텅이로 팔지 않고 국내에서 '제값'을 받고 파는 방식을 처음 시도한 것은 99년 6월에 제1차 KAMCO 미래형채권을 발행하면서였다.부실자산을 바탕으로 자산유동화증권을 발행, 이를 보험·연금·기금 등의 장기투자자들에게 파는 방식이었다.

"국내에서 소화하니 한국신용등급·원화환율위험에 따른 값 후려치기를 피할 수 있었고, 나중에 해당 부실기업의 가치가 올라가면 그 이득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국내 구조조정시장이 이처럼 한단계 올라가면서 외국계 PE·IB들도 더 전문적인 투자에 나선다.

스위스계 다국적 PE인 UBS캐피털은 2001년 7월 해태제과의 제과사업 부문을 따로 떼어 인수했다.세계적 IB인 JP모건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약 4백억원의 자금만을 투입하고, 해태제과의 주채권은행인 조흥은행 등으로부터 장기저리로 3천1백40억원을 빌려 당시 한국 2위의 제과회사를 인수한 것이다.전형적인 차입인수(LBO:Leveraged Buyout)기법이다. 이 거래는 국제금융계로부터 그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가장 성공적인 LBO로 평가받았다.

UBS캐피털은 이밖에도 한라그룹 계열의 만도기계를 인수,㈜만도와 만도공조로 갈라 성공적으로 기업가치를 키워놓았다.

UBS캐피털 한국대표 박영택씨는 "앞으로 2~3년 더 기업가치를 키운 뒤 재상장을 하거나 인수·합병을 시킬 계획"이라고 말한다.

계획대로라면 ㈜만도나 만도공조는 한국 구조조정시장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투자자금회수(Exit) 1호로 기록될 것이다.한국 시장에 대한 국제금융계의 평가도 그만큼 올라간다.

이용호 게이트의 G&G와 골드먼삭스·론스타·UBS캐피털 등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바로 사람과 자본이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법·윤리를 지키는 고급인력,몇년 뒤를 내다보고 기다리는 자본이다.

김수길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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