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장관회의에 나가지 않겠다" : 오늘 4년임기 시작하는 박승 韓銀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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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제장관회의에 나가지 않겠다."

1일 4년 임기를 시작하는 박승(朴昇·66) 22대 한국은행 총재의 일성이 힘차다. 한은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역대 총재들은 "정보 교류도 중요하다" "오라는데 어떻게 안 가느냐"며 꼬박꼬박 경제장관회의에 참석했다. 전철환 직전 총재도 지난해에만 13번 참석했다.

朴신임총재는 '한은 독립의 상징적 조치'로 그런 관행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것이다. 朴총재는 서울 갈현동 집 앞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와 만나 소주를 기울이며 한은 독립에 대한 평소 소신과 농부에서 총재가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한다"며 털어놓았다.

◇"통화신용 정책의 독립성을 지키겠다"=朴총재는 오래 전부터 '한은 독립'을 주장했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때인 2000년 한 기고문에서 그는 "중앙은행 총재는 정부의 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하지 말고 통화금리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었다. 또 자신의 중학교 후배인 전철환 전임 총재에게 "대통령과 독대 채널을 확보하라"고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은법을 개정해 재경부가 보유한 한국은행에 대한 예산권을 미국처럼 국회로 넘기든지, 이것이 어렵다면 기획예산처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朴총재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면 '한은의 독립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생활을 정리할 나이에 한은 총재를 맡은 것은 덤이므로 한달을 하더라도 사심없이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또 이렇게 덧붙였다.

"성장론자라는 말과 함께 제일 언짢은 것이 재정경제부가 추천해 됐다는 식의 이야기다. 재경부도 이런 사람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는 여러 군데 중 하나는 되겠지만 중앙은행 총재는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다."

현재의 경제부처 장관 대부분이 1988~89년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맡았던 朴총재를 '모신' 적이 있어 그가 경제장관회의에 불참하는 뜻을 '비협조'로만 해석하지는 않을 듯하다.

◇"'농부 총재'라고 불러달라"=朴총재는 "필요하면 내부 개혁도 하겠다"면서도 한은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은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그의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싸준 고구마 5개로 점심을 해결하며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렀다. 서울대에 들어가서도 중간·기말 시험 때를 빼고는 고향(전북 김제)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그는 61년 한은에 입행해 공무원이나 기업체 직원보다 많은 월급(8천1백원)을 받으면서 형편이 좋아졌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5·16혁명'이 난 뒤 중앙공무원교육원 강사를 할 때는 모교인 이리공고 교장까지 그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한은 생활을 마치고 72년 미국 유학을 떠나 74년 4월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처와 자식 5명을 모두 두고 떠난 유학시절의 기억이 가장 진하다"고 뒤돌아보았다. 자기 집 마당에 보리를 키우는 그는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며 '농부 총재'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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