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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액션 단골악역 최근엔 멜로 주연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흑인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최초의 영화는 '엉클 톰스 캐빈'으로 1914년 작이고, 배우는 샘 루카스였다. 그러나 최초의 유성 영화로 평가받는 '재즈 싱어'(1927)에서 주연 배우 알 존슨은 하얀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D W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1915)으로 '영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지만 미국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인종 차별, 특히 KKK단과 남부에 대한 우호적 묘사로 비난을 받았다. 백인 주인 딸을 탐하는 사악한 흑인 하인이 흰 이와 하얀 눈자위를 번득이는 장면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기 충분했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이 이 이미지를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해티 맥대니얼. 그녀가 맡은 역할은 날씬한 백인 주인 아가씨 비비언 리의 허리를 조여주며 투덜대는 뚱뚱한 유모였다.

범죄자나 하인과 같은 말단 조연으로만 출연하던 흑인 배우의 역사는 시드니 포이티어로 인해 새롭게 씌어지기 시작한다. 포이티어는 잘 생긴 외모와 성실한 이미지, 괜찮은 영화를 선택해 출연한 주연 배우로 기록된다.'흑과 백''초대받지 않은 손님''투 써 위드 러브''밤의 열기 속으로', 그리고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작인 '들에 핀 백합'까지. 포이티어는 지적이며 사려깊은 주인공으로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데 일조했지만 흑인 사회 일각에선 '백인의 구미에 맞추는 흑인 배우'라며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

포이티어가 구축한 핸섬하고 지적인 흑인 배우 이미지는 덴절 워싱턴이 잇고 있다. 그는 '프리처스 와이프'에서 백인이 도맡아온 천사 역을 맡았을 정도로 좋은 이미지를 가꿔왔다. 러브 신을 찍은 적은 없지만 백인 여성들마저 그를 데이트하고 싶은 가장 섹시한 연예인으로 꼽을 정도다.

워싱턴과 함께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 '알리'의 윌 스미스는 데뷔 시절 출연작인 '5번가의 폴 포이티어'에서 시드니 포이티어의 아들이라고 속이는 귀여운 사기꾼으로 출연한 바 있다. 포이티어의 아들이라는 말만으로 백인 상류 사회 사람들은 그를 신임하며 집안에 들인다. 포이티어-워싱턴으로 이어진 호남이고 지적인 흑인 이미지는 이제 스미스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낙천적인 흑인 떠벌이의 계보를 잇는 스타들이 있다. '48시간''너티 프로페서'의 에디 머피를 대선배로 마틴 로렌스·크리스 락·크리스 터커 등이 포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흑인 배우의 대부분은 아직도 범죄물이나 액션물에 가장 많이 얼굴을 보인다. '블레이드'의 웨슬리 스나입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윌 스미스,'펄프 픽션''재키 브라운'의 새뮤얼 L 잭슨, 감독으로도 진출한 '파시'의 마리오 반 피블스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진지한 드라마와 멜로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특히 스나입스는 '정글 피버'에서 이탈리아계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건축사로,'원 나잇 스탠드'에서는 나스타샤 킨스키와 러브 신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영화, 그래서 흑인 배우의 연기 영역을 넓히는 영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상류층 흑인 여성들의 사랑과 일을 그린 '사랑을 기다리며'의 국내 개봉 때 "흑인들이 저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거야?"라는 관객의 탄식을 들은 적이 있다.사랑과 일로 고민하는 흑인들이 대부분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우쳐 준 감독이 포레스트 휘태커였다.

그러고 보니 스파이크 리 혼자 고군분투하던 감독 분야에도 많은 흑인이 진출하고 있다. 인정 많고 사려 깊은 중년으로 주로 출연하는 배우 모건 프리먼이 '보파'로 데뷔했고, '사회에의 위협'의 휴즈 형제는 최근 '프롬 헬'을 내놓아 이전까지의 과격한 흑인 범죄 이야기에서 벗어나 영역을 확대시켰다.

옥선희<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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