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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12) 제임스 밴플리트 1892~199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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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에 비해 밴플리트의 전공(戰功)은 초라했다. 나름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미 4사단 8연대장으로서 유타 해안에 선발대로 상륙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기는 했다. 하지만, 동기생인 아이젠하워에 비해서는 명망에서 많이 뒤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뚝심의 인물이었다. 특히 군대를 강하게 양성하는 훈련과 교육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빼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때인 1943년 밴플리트는 육군보병학교인 포트 베닝의 훈련 연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계급이 대장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그의 친형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친형은 “ 네 친구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대장이다. 동기생인 브래들리도 이미 소장 계급을 달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뭐 하는 것이냐”고 핀잔을 줬다고 했다. 그런 형에게 밴플리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1951년 9월 국군 훈련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훈련 책임자인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당시 라이프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훈련에 열중할 뿐이다. 일류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 자랑스러운 훈련을 맡고 있는 군인이다.”

그는 191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재학 때는 미식 축구 선수였다. 소령 때 학군단(ROTC) 관리 장교로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풋볼 코치를 8년 동안 지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때 웨스트포인트 미식축구 선수였지만, 도중에 그만뒀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면서 미 8군 사령관이던 밴플리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그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미식축구 코치를 하면서 나는 팀원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방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를 더 연구해서 실행에 옮겼다.”

밴플리트는 그렇게 교육과 훈련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과정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그는 미 3군단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그의 경력 가운데 이채로운 것이 48년 그리스 주재 미 군사고문단장으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영국군 편제로 무장한 그리스 군대를 미국식으로 모두 전환했다. 그리스의 왕실과 두터운 교분을 바탕으로 그리스 부대를 강하게 훈련시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진압하는 경험을 쌓게 했다.

그는 그런 경험 덕분인지 미군이 주둔하는 현지 정부 관계자들과의 우정을 중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월턴 워커, 매슈 리지웨이 등 전임 미 8군 사령관들과 늘 다투고 충돌했던 데 비해 밴플리트와는 항상 사이가 좋았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밴플리트는 주말이 되면 서울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에 있던 8군 사령관실로 이 대통령 내외를 초대해 칠면조 고기와 스테이크 등을 직접 썰어 접시에 담아주는 ‘서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촌사람 같은 인상이었다. 네덜란드계 미국 이민 가정 출신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을 TV에서 볼 때마다 네덜란드계인 밴플리트가 떠올랐다. 그는 나와 함께 걸을 때면 늘 주머니를 뒤져 과자와 오렌지 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반드시 내게 나눠주면서 “같이 먹자”고 했다.

그는 내가 1952년 참모총장에 오른 뒤 한국군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작업에 결정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다. 오렌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함께 나눠 먹는 성품이 한국의 현지 사정을 이해하고 돕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에서의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지휘관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92년 별세했다. 향년 100세였다. 그가 별세하기 2년 전인 90년, 내가 칠순의 나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뉴욕에 살고 있던 나의 큰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플로리다의 목장으로 그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는 휠체어에 누워 있었다. 날씨는 따뜻했지만 모포를 덮고 있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방문을 무척 반겼다.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40년 전 함께 누볐던 전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가끔 눈물도 지었다.

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눌 때였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를 간호하던 딸만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거실에 있는 그를 놔두고 문을 나설 때 나는 그의 딸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뭐, 다른 말씀이 아니라, 꼭 점심을 먹여서 보내라고 하시던데요.” 그런 밴플리트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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