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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헤라트로 가는 유엔機 안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여기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아프가니스탄 헤라트로 가는 유엔 전용기에 타기 위해 대기 중이다. 어제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있었기 때문인지 옆 나라인 파키스탄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공항에서 만난 국제기구 직원 얘기로는 주민 상황이 가장 열악한 북쪽 헤라트는 오히려 평온하단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은 평온치가 않다. 짐 때문이다. 유엔기가 12인석 소형 비행기라 한 사람의 짐을 20㎏으로 엄격히 제한하는데 내 짐은 보기에도 어마어마하다. 일단 통신 장비만도 한 가방이다. 노트북 컴퓨터·6㎜ 카메라·디지털 카메라·소형 녹음기에 위성 전화까지. 한달간 살림살이 역시 만만치 않다. 이곳 문화를 감안, 머리에 두를 스카프와 몸의 선이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들을 골라 넣었다. 침낭·상비약·선탠 로션도 필요하고 일기장과 메모 수첩, 전통 문양의 열쇠 고리도 챙기고 묵주와 성경책도 넣었다.

인 천공항에서 큰언니가 기어이 넣어준 '비상용' 튜브 고추장 한 박스까지 있으니 무게 초과일 수밖에. 탑승 등록할 때 몸무게를 물어보던데 나는 남자요원에 비해 10㎏은 적게 나가니 내 짐은 좀 봐주지 않을래나?

그나저나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많은 전화를 받았다. 대부분 자원봉사를 하고 싶으니 아프가니스탄에 같이 가자는 내용이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긴급구호 현장은 전문기술을 가진 인력이 가야 함을 이해시켜야 했다. 한 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물·식량·의약품·천막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우선 물 공급을 위해서는 식수 전문가가 현장의 우물이나 강물을 식수로 쓸 것인지, 쓴다면 어떤 정수과정을 거칠 것인지를 신속히 파악해야 한다.

식량도 그렇다. 어떤 것을 어떻게 얼마만큼 공급하느냐가 중요하다. 평소에 먹던 것과 크게 달라 설사를 유발하는 양식은 오히려 목숨을 앗아간다.

그래서 의료진은 말할 것도 없고 천막 치는 것조차 전문가가 필요하다. 몇 년 전 헤라트 근방에서 비닐 텐트 난민촌의 1백여명이 밤 사이에 얼어 죽은 일이 있다. 기온이 곤두박질치게 마련인 산악지대라는 것을 감안, 천으로 된 텐트를 쳐야 했다.

이외에도 물자를 신속히 확보하고 배분하는 물류 인력과 현장 안팎의 사정을 파악하고 알리는 홍보인력도 전문인이어야 한다. 개인 인력과 마찬가지로 비정부기구(NGO)들도 각각의 전문 분야가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의료를 전문으로 한다면 월드비전은 식량확보와 배급이 주임무다.

이번 헤라트 프로젝트도 그렇다. 현재 월드비전은 이 지역 난민 및 주민 37만명에게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등을 배급하는 대형 구호식량 배급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막대한 식량은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유니세프)과 세계식량계획(WFP)에서 확보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월드비전 한국은 영양실조 상태가 심각해 일반 구호식량을 먹을 수 없는 5세 이하의 어린이와 임산부·수유부에게 치료용 영양죽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고 있다. 이들은 지금 당장 영양죽을 먹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들에게 그것은 말 그대로 생명줄이다.

올 6월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의 총 비용은 약 10억원으로 그중에는 한국국제협력단에서 지원받은 1억3천만원이 들어 있다. 정부가 민간단체에 처음으로 주는 긴급구호 사업비인데,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은 자기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에게 구명줄을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그 나머지 사업비는 순전히 민간 모금 및 물자기증으로 마련하고 있다.

힘겹지만 이 과정에서 쏟아지는 미담이 우리를 강하고도 신선한 에너지로 채워준다. 2000년 말, 한 성당에서 받은 성금은 평생 잊지 못한다. 성금 3백50만원 중 1백만원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보냈다. 세뱃돈과 용돈·상금 등을 알뜰히 모은 돈이라는데 이 아이는 지난해 가을 백혈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이 부모님은 은행통장에 들어 있던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월드비전에 보내셨다. "우리 아이도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살리는 데 줬다고 하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라고 하면서. 이제 1시간 후면 헤라트로 날아간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아까 마신 진한 커피 때문만은 아닐 거다.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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