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엔 복수로… '분노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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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누구라도 극장을 나서면서, 방금 본 영화의 모든 장면을 바둑처럼 복기(復棋)해 낼 수는 없다. 어떤 장면은 아예 기억의 맹점(盲點)으로 사라져 재생할 수 없고 또 어떤 장면은 안개처럼 흐릿해 함께 본 옆 사람의 인상과 대조해 볼 필요가 생긴다. 하지만 영화 속 영상이나 사운드가 너무나 강렬해 극장을 나서고도 한동안 떨쳐버릴 수 없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본 관객들은 끔찍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오랫 동안 잔상으로 갖게 될 것 같다. 두 발이 묶인 채 차가운 강에 서 있는 청년의 인대를 칼로 자르자 피가 펑펑 쏟아져나온다든지, 송곳으로 목을 찌르자 검붉은 피가 수평으로 분수처럼 내뿜고, 여성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어놓고 전기 고문을 가해 죽이는 장면 등등.

'공동 경비구역 JSA'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은 신작의 시사회를 앞두고 기자에게 "영화를 미리 본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하네요.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라며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사회장에서 사회자가 "혹시 이 자리에 임신부가 계시면 가급적 관람을 삼가주세요"라며 사전 양해를 구할 만큼 여태까지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신체 훼손적인 장면들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감독은 "내가 여태껏 만든 영화 중 가장 취향에 맞는 영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충격적인 영상은 애초 감독의 의도이기도 했다. 그는 "일체의 웃음과 과장을 걷어낸 잔혹한 폭력의 비극"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이를 통해 한국 영화 최초로 정통 하드 보일드 무비(비정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영화)를 선보이겠다고 호언해 왔다.

사실 잔혹한 장면의 유무는 영화의 질과는 별개다. 영화 속 폭력 이미지가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온갖 언설에도 불구하고 '대부'를 비롯해 '좋은 친구들'(마틴 스코세지)'파고'(코언 형제), '펄프 픽션''저수지의 개들'(쿠엔틴 타란티노) 등에서 보여준 폭력 장면은 그 기괴함과 어두운 유머 때문에 역설적으로, 안온하게 가려진 장막 뒤의 뒤틀린 현실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던 예들인 것이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은 폭력과 잔혹의 이미지를 현실의 아이러니와 연결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못함으로써 완전히 삶아진(하드 보일드) 영화가 되지 못하고 반숙(半熟)에 머문 느낌이다.

하드 보일드란 일본어투로 번역하면 '비정파(非情派)'가 된다. 하드 보일드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나약한 감상과 로맨틱한 연애(사랑)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냉정과 과묵, 한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성이 이들의 특징이다. 정글 같은 현대 생활을 헤쳐가자면 감정적 방심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청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류(신하균)는 유일한 혈육인 누나의 도움으로 화가의 꿈을 키운다. 하지만 누나가 신부전증을 앓아 생명이 위험에 처하자 꿈을 접고 공장에 다니며 누나를 간호한다. 그러나 신장을 이식 받기로 한 장기 밀매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돈만 날린다.

한편 류의 애인인 영미(배두나)는 누나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린애를 유괴하자고 꾄다.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면서 혁명을 뇌까리는 영미는 엉뚱하고 괴팍한 인물. 결국 이들은 류가 다니던 공장의 사장 동진(송강호)의 딸을 유괴하지만 이를 안 류의 누나는 자살해 버린다.

이제 이들에겐 장기 밀매업자와 유괴범을 향한 피의 복수만 남게 된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 과정에서 온갖 끔찍한 영상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덤덤히 찌르는 칼질과 기괴한 고문·폭력장면들을, 복수를 자행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필연적인 행위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JSA'에서 관객에게 어필했던 코믹한 대사는 이 영화에선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돌고 있고 비정파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긴 다소 풀어진 인물들의 연기도 영화의 흐름을 옆길로 돌려버렸다. 특히 끝을 장식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행태는 생뚱스럽기 그지없다. 29일 개봉.

글=이영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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