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추적] 성폭력 피해 여성을 죄인 다루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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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성폭행을 당해 경찰서 강력반에서 조사를 받던 20대 후반의 회사원 A씨. 그는 다시 한번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수사관은 A씨에게 "옷을 벗었어, 벗겼어" "똑바로 말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A씨는 "어머니가 곁에 있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으며 공개된 자리에서 수사가 진행돼 수치심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다니던 학원강사에게 성폭행당한 B양(9)은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바람에 경찰 대질수사.검찰 수사를 되풀이해 받아야 했다. 1년여에 걸친 여러 차례의 진술에 심적 타격을 받은 B양은 자폐증세를 보여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성폭력 범죄 피해자가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또 한번 겪게 되는 정신적.심리적 고통인 성폭력 '2차 피해'가 심각하다. 피해자 보호제도가 미흡하고 수사관 등의 인식이 부족 하기 때문이다.

◆ 실태.원인=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2002년 성폭력 2차 피해로 상담한 건수는 모두 267건. 이는 전체 상담건수 2961건의 9% 수준이다. 상담 결과를 분석해 보면 일선 수사관의 인식 부족이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함께 즐긴 뒤 고소하는 게 아니냐" "피해자가 가해자를 유혹한 것" "남자의 애정 표현" 등으로 가해자를 편파적으로 비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무고죄'등을 들먹이며 피해자를 협박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지난 4월'성폭력 사건 조사지침'을 만들어 전국 일선 경찰서에 내려보냈다. 이번 밀양 성폭행 사건에서 지침은 무용지물이었다.

지침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 여성 조사 때 피해자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 여학생들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에게서 "밀양 물 다 흐렸다"는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지침에는 여자 경찰관이 상담실 같은 별실에서 여성 피해자를 조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피해 여학생들은 여자 경찰관에게 조사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1차 조사 때 여경이 잠시 입회한 것을 제외하곤 형사계 사무실에서 남자 경찰관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또 "대질 조사는 최후 수단으로 시행하라"는 지침이 있음에도 피의자 앞에서 자신을 괴롭힌 남학생을 지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지침에는 이를 어겼을 때 징계.처벌 규정이 없는 실정이다. 전국의 성폭력 전담 경찰관은 10월 현재 774명. 이 중 여성경찰관은 264명에 불과하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이 올해에만 1만2000여건인 점을 감안하면 여성 경찰관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한 실정이다.

◆ 정부 대책=여성부는 13일 현지에 진상조사반을 파견, 피해자 가족을 만나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법무부.경찰청에 대책 마련을 요청했다. 여성부는 "피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면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인권 보호를 하지 않는 공무원을 징계.처벌할 수 있는 근거 마련 등이 검토되고 있다.

국가인권위도 밀양 성폭력 사건에서 드러난 수사관 등의 인권 유린 사례에 대해 직권 조사에 들어갔다. 이를 통해 성폭행 피해자 보호의 허점도 찾아내겠다는 방침이다.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무엇보다 수사.공판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경란.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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