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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포상에 정신 팔린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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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정갑 울산경찰청장은 13일 밀양 고교생들의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인권보호에 소홀했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또 수사를 지휘했던 울산남부경찰서 형사과장.강력반장 등 2명을 다른 곳으로 전보발령했고, "너희가 밀양 물을 다 흐려놓았다"며 피해 여중생에게 폭언을 한 경찰관은 직위해제했다. 그는 5일 전만 해도 여유가 있었다. 사건 발표 하루 만인 지난 8일 일선 형사 2명을 '범인 조기 검거' 등의 공적으로 표창했다. 당시 형사과장 등 간부들에겐 내년 1월 정기 승진인사 등을 통해 따로 보상이 있을 것이란 얘기도 나돌았다.

동료 경찰들은 "당시 승진심사를 위한 인사고과 자료가 만들어지던 시기여서 하루라도 빨리 공적을 내려는 조급증 때문에 피해자 인권을 제대로 고려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수사 과정을 돌이켜 보면 그런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우선 사건 발표가 이례적으로 빨랐다. 7일 새벽 41명의 용의자를 붙잡아 조사를 시작해 이날 낮 12시쯤 사건 발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나온 보기 드문 속전속결식 수사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돼 있는'범인 식별실'이 있는데도 한 사람씩 보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용의자 41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여중생더러 "가해자를 찍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게 접근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 수사의 기본이다.

그런데도 피해 여중생이 가해자 측 가족에 둘러싸여 협박받도록 방치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발표문도 그렇다. 피해를 보지도 않은 여중생의 동생까지 당했다고 하는 등 피해.가해자 숫자를 4배까지 뻥튀기했고, 있지도 않은'밀양연합'이란 고교생 폭력조직도 만들어 냈다.

한 청장은 "앞으로 적법한 수사절차를 지키고 피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잿밥(포상)에 정신이 팔려 제사(인권보호)를 그르치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기원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