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층을 88층이라 하니 돈 싸들고 오는 중국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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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그런데 이 아파트를 처음 찾는 이들은 승강기 버튼을 누르려다 한번쯤 깜짝 놀란다. 66층 다음 위층이 88층이기 때문이다. 버튼을 보면 희한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죽음을 뜻하는 사(死)를 연상케 하는 4층이나 14,24,34층이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정도가 심하다. 40층대가 통째로 없다. 50층대도 빼고 바로 60층으로 건너뛴다. 60층대에서도 61·63·66·68층만 있다. 주변 건물과 눈대중을 해보면 얼추 40여 층 높이 건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건물의 난해한 층고 명명법은 88층에서 방점을 찍는다.

시행사인 핸더슨토지개발은 ‘불탑(주방가구)’ ‘빌러로이 앤드 보시(욕실용품)’등 최고급 사양의 마감재로 장식한 이 아파트의 주 소비층을 중국과 해외의 큰손들로 잡았다. 중국인과 화교의 ‘8자 편집증’을 분양 마케팅에 끌어들인 것이다. ‘숫자 마케팅’이라고나 할까. 홍콩총영사관 수석연구원인 전가림 박사는 “중국인들이 88층에 달하는 높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88층이라는 숫자를 지닌 주거공간에 산다는 데 의미를 둔 세일즈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숫자에 민감한 중국 비즈니스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8(빠)’은 돈을 벌고 재화를 모은다는 ‘파차이(發財)’의‘發(파)’와 발음이 가장 흡사한 숫자라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미국 예일대를 졸업한 한 중국인은 올 초 모교에 888만8888달러(약 100억원)를 기부해 화제가 됐다. 2006년 저장(浙江)성에선 ‘저장C 88888’ 번호판이 166만 위안(약 2억8500만원)에 거래됐을 정도다. 수퍼에 가면 가격표가 98위안·18위안·188위안처럼 8자로 끝나는 것이 유독 많다.

핸더슨토지개발 측은 중국인들의 8자 선호에 맞춰 로비를 8층에 뒀다. 리쇼키(李兆基) 회장은 “소비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고들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또 매사가 물 흐르듯 술술 풀리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류(流)자와 비슷한 발음인 6(六)자도 좋아한다. 핸더슨은 68층(매사가 술술 풀려 돈을 잘 번다)을 88층 바로 아래에 배치해 그 의미를 극대화했다. 이런 작위적인 층수 명명 탓에 분양 사기 오해도 받고 주택 감독당국의 경고도 받았지만 돈벌이로는 대성공이었다. 68·88층 분양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서 다른 층도 분양이 팍팍 돼 마침내 100% 분양을 한 것이다. 핸더슨 측은 “계약자가 모두 홍콩 이외 지역 분들”이라고 전했다. 해외 화교가 68층을 거둬들인 것을 비롯해 중국 본토와 해외 화교들이 물량을 쓸어갔다. 88층은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 같아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8자를 너무 좋아하고 4자를 꺼리다 보니 중국 고객이 선호하는 홍콩에서 층수 부풀리기는 예삿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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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건스탠리·크레디트스위스 같은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속속 입주해 화제가 된 웨스트 카우룽의 ‘ICC(국제상업센터) 빌딩’의 층수도 뻥튀기의 전형이다. 실제로는 로비부터 꼭대기까지 100층, 로비 아래층 상가까지 합치면 104층, 지하 주차장까지 합치면 109층인데 118층으로 층수를 부풀린 것이다. 이 때문에 118층이라는 이 건물 높이(484m)가 대만 타이베이의 101층 빌딩(508m)보다 오히려 낮다. 지하 1·2층 다음에 3층·8층(로비)으로 건너뛰면서 118층에 맞춘 것이다. 중국어로 1자는 희망을 뜻하는 조동사 야오(要)와 발음이 비슷해 118은 ‘돈 잘 벌기를 무척 기원한다’는 뜻이 된다.

화교계인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이 지은 싱가포르 센토사 카지노도 개장식에서 숫자 마케팅을 활용했다. 지난 2월 문을 연 싱가포르 첫 카지노의 테이프 커팅 시간을 오전 11시18분, 손님들에게 카지노를 개장한 시간은 낮 12시18분이었다. 8자에 민감하기는 홍콩 공무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홍콩섬의 금융 1번지인 88층짜리 ‘2 IFC’의 88층은 홍콩 금융관리국이 꿰찼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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