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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룰 바꿔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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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폐막식이 거행된 지난 25일(한국시간)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전명규(39)감독은 혼자 선수촌에 남아 마지막 일지를 썼다.일지에는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아쉽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준 선수들이 고맙다'라고 썼다.

그리고 매번 그랬던 것처럼 텁수룩한 수염을 깎으며 귀국 준비를 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전감독만큼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는 지도자로서 올림픽에 다섯차례나 참가했으며,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올림픽 이후 한국이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올린 11차례의 시상식을 지켜봤다.

87년 코치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전감독은 93년 여자전문코치로 사실상 감독 역할을 맡았고, 95년부터는 한국 쇼트트랙의 총지휘자가 됐다. 26일 새벽 선수촌에서 짐을 꾸리고 있던 전감독을 전화로 만났다.

-올림픽이 끝났다. 기분이 어떤가.

"한마디로 '잠 못 이루는 솔트레이크시티의 밤'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어린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특히 여자선수들은 엄청난 체력훈련을 견뎌냈다."

- 한국에 불리한 판정을 한 짐 휴이시 주심은 누구인가.

"호주 빙상연맹 회장이다. 평소 e-메일을 주고받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쇼트트랙은 같은 상황을 놓고 보는 위치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평소 많은 대화를 하며 교류한다. 특히 그가 올림픽 심판으로 결정된 뒤에도 불리한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런 결과를 빚었다."

- 대회 후 휴이시가 말을 바꿨다는데.

"김동성이 실격된 뒤 처음 항의를 했을 때 '크로스트랙'이라고 했다. 그런데 5백m 대진편성 때 '어떻게 된 상황이었느냐'고 묻자 그는 '투스텝을 했다'고 말했다. 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을 때는 꼬투리를 잡히니까 '그런 말 한적 없다'고 잡아뗐다."

- 각국 선수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대체적으로 심판이 경기 운영을 잘못했다는 것이었다. 유럽선수권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파비오 카르타는 김동성에게 '동성아, 2006년에는 걱정마라. 우리 토리노에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라고 했다. 평소 김동성과 카르타는 친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친해졌다."

- 김동성과 카르타는 영어로 말하나.

"두 선수 모두 영어는 서투르다. 그런데 둘이 만나면 손짓 발짓으로 통하지 않는 대화가 없다. 카르타에게 '네가 한국에서 떴다더라'고 알려주자 '이번 여름에 한국에 가서 훈련할 수 없겠느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카르타는 동성이를 '김동방'이라고 부른다."

- 남자선수들이 실격된 날 공교롭게도 여자선수들이 꼭 메달을 따냈다. 여자선수들의 마음고생도 심했겠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금메달 획득 가능성이 컸던 남자 계주가 첫날 실격되자 모두 어쩔줄 몰라 했다. 자칫하다가는 여자선수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 일단 남자선수들을 라커 밖으로 내보냈다. 고기현과 최은경이 1천5백m에서 금·은메달을 따고도 기뻐하지 못했다. 계주 금메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뷰에서 "오빠들이 많이 도와줘서 금메달 땄다"고 했을 때는 너무 흐뭇했다."

- 남자선수들이 어떻게 도와줬나.

"쇼트트랙 선수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다. 예를 들면 코너를 돌 때 급하게 파고드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널찍하게 도는 선수가 있다. 계주훈련 때 김동성은 양양A의 대역을, 이승재는 양양S 역할을 하는 등 가상훈련을 해줬다."

- 김소희 등 제자들도 찾아와 후배들을 격려했다는데.

"IOC 위원 선거에 나섰던 전이경과 일리노이주 노던아메리카대학원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전공하는 김소희는 후배들에게 티셔츠·양말·먹을 것 등을 사다주며 잔심부름까지 했다. 제자들이 선수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 제몫을 하는 것을 보니 기쁘다."

- 앞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점이 있다면.

"빙질 좋은 전용 링크가 꼭 있어야 한다. 올림픽이 열리는 세계 수준의 링크와 태릉링크를 비교하면 맨땅과 잔디구장만큼 차이가 난다. 좋은 빙질에서 훈련을 해야 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 때문에 큰 대회 직전에는 전지훈련을 해야 한다."

- 쇼트트랙 규정개정의 필요성은.

"이번 대회를 계기로 각국 지도자들이 룰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는 5월께 일본 교토에서 열리는 국제빙상연맹(ISU) 총회에서 활발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 한국 쇼트트랙의 앞날은 밝은지.

"중국·캐나다 등은 대부분 주전들이 노쇠했다. 1~2년 안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다. 우리 여자팀은 앞으로 최강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 앞으로 일정은.

"27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사흘 만 쉬고 세계 팀선수권대회(3월·미국)와 세계선수권대회(4월·캐나다)에 대비하기 위해 3월 3일 태릉선수촌에 다시 입촌할 예정이다. 당분간 잠이나 푹 자고 싶다."

전감독은 "쇼트트랙도 투자한 만큼 나온다. 지금까지 삼성화재에서 20여억원을 지원해 줘 해외훈련이나 장비구입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말 고맙다"면서 "이 말만큼은 꼭 써달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성백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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