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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국가 과제 <6> 철길을 살리자 (上) : 철도 늘려 길 뚫리면 기름절약 年2兆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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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프랑스 수도 파리에는 고속버스 터미널이 없다. 교통망이 철도 위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파리 도시권의 면적은 우리 수도권과 비슷하지만 철도길이(1천6백12㎞)는 네배나 된다. 시내엔 메트로(지하철)망이, 인근 도시까지는 급행전철(RER)망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어 파리 도심과 외곽을 오가는 사람의 70%가 철도를 이용한다.

반면 서울과 분당·일산 등 신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은 25%만 전철·지하철을 탄다. 그 결과 외곽에서 서울을 들고나는 차들이 지불하는 기름값만 매일 1백70억원이 넘는다.

서선덕 한양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더 이상 도로에 투자해봤자 경제적 효과가 나지 않는다"며 "철도를 개선해야 각종 비용을 줄여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꽉 막힌 도로, 늘어나는 불만=도봉구 방학동에 사는 회사원 염모씨. 지난해 초 차를 샀지만 시청 앞 회사까지 한시간 이상 걸리는 체증 때문에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주말에도 차를 못쓰긴 마찬가지다. 아이들 성화에 몇차례 경기도 일대 나들이에 나섰다가 반나절씩 차에 갇힌 뒤부터 "안 움직이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본지 여론조사팀이 서울시민 6백10명을 대상으로 23일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열명 중 여덟명꼴로 "교통체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이들 중 과반수(55.8%)가 매일 30분 이상을 체증때문에 길바닥에 버린다고 밝혔다.

마음누리 정신과 정찬호 원장은 "제한된 공간에서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을 보내야 하는 교통체증은 몸과 마음에 심각한 장애를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최상진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교통체증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욕구 좌절→분노→적개심으로 발전한다"며 "대도시 운전자들은 날마다 '전쟁'을 치르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계에 닥친 도로교통=도로를 더 놓는다고 교통혼잡이 해소되진 않는다. 도로가 늘면→혼잡이 다소 해소되지만→너도 나도 차를 몰고 나서며→다시 혼잡해지기 때문이다. 서울의 자동차 통행속도는 갈수록 떨어져 현재 시속 18~22㎞에 불과하다.

서울서 최근 5년간 늘어난 자동차 27만대를 감당하자면 4차선 도로 6백75㎞(내부순환도로 15개분), 주차장은 1백만평(여의도 면적의 1.2배)이 필요한데 이는 국가경제력으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

"갈수록 땅값이 올라 서울서 도로를 놓는 비용은 이제 ㎞당 6백억~8백억원으로 지하철 놓는 비용(㎞당 1천억원)과 맞먹는다. 게다가 하천 위로 고가를 놓는 것 외엔 땅을 확보할 길도 없다."(고승영 명지대 SOC공학부 교수)

에너지 비용과 환경오염도 방치할 수 없는 상태다. 90년대 들어 자동차가 급증하며 석유 수입에 드는 돈이 10년새 세배 가까이로 급증했다. 연간 자동차 연료에서 배출되는 대기오염 물질은 1백56만t(2000년)으로 전체 대기오염 물질의 절반에 육박한다.

◇철도 살려야 도로도 산다=지난 20년새 고속도로가 1백50% 늘어나는 동안 철도는 1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외국과 비교해 봐도 우리 철도 길이는 인구 만명당 0.6㎞인데 일본은 1.6㎞, 독일은 4.6㎞나 된다.

전문가들은 "대안은 철도"라고 입을 모은다. 승용차 탈 사람 중 일부만 철도로 옮겨가도 도로 소통이 한결 원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교통개발연구원은 국가철도망을 최적 수준으로 건설할 경우 2020년엔 연간 휘발유 소비량만 20억ℓ를 줄여 2조4천억원의 비용이 절감된다고 추산한다.

◇철도 어떻게 살려야 하나=지금처럼 "불편해도 대중교통인 철도를 애용하라"는 식의 호소는 더 이상 안통한다. 승용차 인구를 철도로 유도하려면 ▶역까지 오고가는 시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철도 속도를 빠르게 하고▶환승체계를 최대한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도시철도의 경우 현재 시속 40㎞ 이하에 머물고 있는 평균속도를 60~7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그러려면 돈이 들더라도 잘못된 노선을 바로잡고 환승 인구가 많은 노선끼리는 직통할 수 있도록 철도를 연결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손의영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

'도어 투 도어'로 연결해주는 승용차 대신 철도를 타게 하려면 편안함도 갖춰줘야 한다. 지하철을 기피하는 이유를 묻는 서울시민 대상 설문조사에선 "계단이 많아 오르내리기 불편하다""갈아타는(환승) 통로가 멀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의 평균 깊이는 18m로 6층 건물 높이와 맞먹는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역은 전체의 절반, 엘리베이터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미국 워싱턴의 경우 74개 지하철 역에 에스컬레이터는 5백22개, 엘리베이터는 1백82개나 있다.

철도와 버스가 경쟁하는 비효율적인 대중교통 체계도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철도는 중심 교통수단으로, 버스는 역까지 이동하는 보조수단으로 역할분담을 시켜야만 현재 30%대에 머물고있는 서울시내 지하철 이용률을 60%까지 높일 수 있다"고 윤혁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신예리 경제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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