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역과 로빈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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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약 4년 전인 1998년 3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안내로 케이프타운에서 13㎞ 떨어진 로빈섬을 방문했다. 아프리카 흑인운동의 투사들이 감옥에 갇혀 모진 고생을 했던 곳이다. 특히 만델라 대통령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맞서다 90년 석방될 때까지 27년간의 수감생활 중 18년을 독방에서 보냈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두 나라 지도자가 그 감옥의 육중한 쇠창살 너머 바깥 세상을 내다보는 장면과 만델라가 변기로 사용했던 물통, 덮고 자던 두장의 모포가 덩그렇게 놓여 있는 독방의 스산한 분위기가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흥미를 끌었던 뉴스는 감옥을 둘러보고 나온 클린턴에게 던진 만델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두웠던 한 시절에 우리를 도와준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 명령입니다." 만델라가 말한 그들이란 미국이 테러국가로 지목한 리비아·이란·쿠바였다. 만델라는 긴장완화를 위한 최선의 방안은 미국이 강자로서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사흘 전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안내로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도라산역을 방문했다. 경의선 철도의 남측 최북단역으로 북한 개성으로부터 불과 14.2㎞ 떨어진 곳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 길(경의선)은 분단된 이 땅의 남과 북쪽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줄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고 연설했다. 그리고 철로 부설용 콘크리트 침목에 '이 철로가 한국 민족을 통일시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쓴 뒤 서명했던 장면이 오래도록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아공의 '추방의 섬'에 섰던 클린턴 대통령과 남북한 '분단의 현장'에 섰던 부시 대통령을 영접한 만델라·김대중 대통령은 모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미국의 두 대통령 또한 북한·이란 등을 가리켜 '테러 지원국' 또는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상대국 지도자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상황은 약간 엇비슷하나 그 내용과 반향은 엄청 다르다. 정상회담 후 만델라의 인권정책은 계속 각광받았으나 金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로빈섬은 사적지로 지정된 후 관광명소가 됐다. 이와 전혀 다른 역사의 산물인 도라산역도 곧 세계적 안보관광명소로 조성된다. 이 역이 화해와 대화의 상징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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