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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밖으로 탈출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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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70년대 미국 과학자들이 고등동물의 행동발달을 연구하기 위해 야생 침팬지를 우리에 가두고 기호가 새겨진 12개의 버튼을 이용해 우리 밖의 과학자들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가르쳤다. 침팬지가 우리 안에서 바나나가 그려진 버튼을 누르면 바나나가 우리 안으로 투하됐다. 물이 그려진 버튼을 누르면 물이 공급됐다. 심지어 애정을 상징하는 기호가 새겨진 버튼을 누르면 과학자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침팬지를 껴안아 주거나 함께 놀아주다가 나갔다.

우리에 갇힌 침팬지는 어떤 버튼을 눌러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익혔다. 과학자들은 버튼의 위치를 뒤섞어 놓은 다음에도 침팬지가 옳은 버튼을 찾아 누르는지 실험해 봤다. 침팬지는 버튼의 위치가 바뀐 뒤에도 정확하게 버튼을 눌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침팬지는 야생 환경에 있다가 안전한 우리 안에 갇히면서 진화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습득한 다양한 능력이나 예민하게 발달시킨 감각들은 전혀 쓸모없게 됐다. 대신 12개의 버튼으로 단순화된 우리 안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침팬지는 우리 안의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빨리 파악해 그에 의존하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즉 생존을 위해 필요한 바나나.물.애정 등을 얻기 위해 버튼의 위치가 바뀐 뒤에도 옳은 버튼을 찾아 누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했다.

위의 실험은 침팬지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이 처한 상황과도 크게 닮아 있다. 인간은 자연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도시화된 환경을 건설하고 그 속에 안주함으로써 스스로를 문명이라는 우리 속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에 갇힌 침팬지가 새로운 능력을 키워야 했듯이 문명세계에 갇힌 인간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능력과 성격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이 농사를 짓거나 자연에 의존해 살 때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능력과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살았다. 최근까지 에스키모족이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러했듯이 인간은 눈을 56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고, 꿈을 수백 가지 형태로 나눠 해석할 수 있었다. 또 오늘날 우리가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바람 소리나 냄새의 변화도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충격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문명세계는 그 같은 다양한 인간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대신 좀더 경쟁력 있는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 직장에서 업무를 남보다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요구하게 됐다. 이 같은 능력은 대안이 많지 않은 도시화한 환경 속에서 생존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돼버렸다. 경쟁력 있는 대학이나 직장, 승진 기회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뒤따른다.

치열한 경쟁적 상황은 개인으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성격, 빠른 두뇌 회전 능력, 교묘하고 작위적인 능력, 호감이 가는 용모와 성격 등을 발달시키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능력도 바로 이 같은 것이 돼가고 있다. 최근 학생들이 수능 시험장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해 저지른 부정행위나 입사시험에서 좀더 경쟁력 있게 보이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현상 등이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해 준다.

교육을 통해 젊은 세대가 특정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능력은 우리 속으로 바나나가 떨어지게 하는 버튼을 정확히 찾아 누르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 밖의 세계는 그 세계의 리듬과 질서를 익히면 가장 안정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탁광일 생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