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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처럼 듬직한 연기인생 최 불 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방 송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연기자를 만난 내 친구가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평소 TV를 잘 안 보는 친구였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버님 친구분 같아서 그냥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더라고…." 그가 배우 최불암이다.

설악산에 화강암이 있고 제주도에 현무암이 있다면 한국 TV엔 최불암이 있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기를 시작한 그는 지금 한국 대중문화사의 흔들림 없는 바위요, 거목이다. 한동안 '전원일기'에서만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 얼굴에 햇살이'에서도 농익은 연기를 유감없이 내보이고 있다.

그는 1966년 '극단 자유'에서 연기 이력의 첫발을 내디뎠다. 입지 과정은 스타 지망생에게 필독의 교과서다. 그는 애초에 인기를 탐하지 않았다. 자신이 신성일이 아님을 알았고, 따라서 꼭 필요한 조역부터 차근차근 소화해냈다(20대에 이미 노인 역을 시작한 그다). 오래도록 살아남는 연기자는 모름지기 기본에 충실한 자, 즉 연기를 잘 하는 자라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깨달았고 실천했다.

그뿐인가. 그는 결코 '오버'하지 않는다. '오버'는 일시적으로 눈길을 끌지만 대중의 마음을 오래 잡아두지 못한다. 신비감보다 친밀감이 생명력 있음을 그의 성장기는 증언한다.

최불암이라고 늘 점잖거나 고개 숙인 아버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열광의 대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푸른 수평선 너머(Beyond the blue horizon)'가 배경음악이었던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그는 황혼의 터프 가이 캡틴 박 역을 멋지게 연기했고, 그때 그는 핸섬 가이 송승헌을 능가하는 매력 만점의 '오빠'였다.

그가 국회의원 재선을 위해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가 던진 말이 인상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최불암을 일개 국회의원으로 초라하게(?) 남겨두기보다는 국민배우로 남게 하자." 최불암 스스로도 정치판을 기웃거린 이력으로 인해 혹시 기회주의자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회주의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분주히 옷을 갈아입는 자다. 그가 그런 자였다면 대중이 그를 용납했을 리 없다. 그가 '귀향'한 후에도 여전히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호감도 조사에서 그의 이름은 빠진 적이 없다. 대중은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다.

'최불암 실록'의 한쪽엔 수사반장, 다른 한쪽엔 전원일기를 기술하며 그는 한국인의 감성과 의식 속에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사오정·만득이와 더불어 버젓하게 최불암 시리즈가 존재했던 근거도 그런 가부장적 권위를 조금 비틀어보고 싶은 대중적 욕구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백년 후 20세기 한국의 아버지상을 분석하려는 학자가 있다면 영화에서의 김승호와 함께 TV의 최불암 이미지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사반장일 때도 그는 냉철하거나 직업정신에 투철하기보다는 매번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지도에선 찾을 수 없는 양촌리의 김회장도 결국 '인간적'이기 때문에 1천회를 넘기며 장수하는 것이 아닐까.

그를 흉내내려면 그냥 '파-'하고 웃으면 된다. 너털웃음 하나로 모든 허물을 감싸안는 포용력. 젊은이들이 율동하며 부르는 노래 '바위처럼'의 가사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을 뒤집으면 흔들리지 않는 최불암이 남는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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