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6) 다시 날아온 미 8군 사령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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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의 중공군 대공세에 힘없이 무너졌던 국군은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겨야했다. 국군은 준비와 훈련이 부족해 늘 중공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다. 그런 국군의 전력을 재건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사진은 경기도 문산 근처의 한 참호 속 국군병사의 모습. 휴전회담이 열렸던 52년 무렵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밤에 나타나 유령처럼 공격해 오던 중공군은 그야말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자세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은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수도사단은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그 포로들을 거의 주워 담다시피 했다.

북진을 시작한 수도사단은 중공군에게 밀려 흩어져 내려왔던 국군 3군단 장병을 대거 거둬들였다. 개인화기는 물론이고 복장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3군단 장병의 모습은 참혹했다. 눈이 녹아내린 물만 마시면서 겨우 연명한 채 5일 이상을 쫓겨 내려온 패잔병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나도 공격부대의 후미를 쫓아 인제와 원통까지 가봤다. 중공군은 공격 능력과 의지를 모두 상실했던 모양이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로는 간성과 거진까지 우리 1군단이 모두 탈환했다. 서부전선에서도 중공군의 주력이 동쪽으로 몰린 틈을 타서 아군은 38선을 회복했다. 동부전선에 몰렸던 중공군 주력의 패주 상황으로 보건대, 저들이 다시 공격해 전선이 요동칠 가능성은 없었다.

1951년 5월 25일이었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다시 내가 있던 강릉으로 날아왔다. 비행장에 내린 그는 대기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우리와 마주 섰다. 당시 강릉에는 1군단 외에도 육군본부 전방지휘소가 있었다.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를 대신해 전방에서 지휘를 하는 곳이었다.

정일권 참모총장이 와 있었고, 나와 전방지휘소장 이준식 준장 등이 그를 맞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우리 앞에 성큼성큼 걸어온 밴플리트 장군은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대신 돌연 “한국군 3군단을 폐지한다. 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도 없어진다. 육본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수와 훈련에만 국한한다. 한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받으며, 육본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고 말했다.

정일권(1917~94)


그때 내 눈에는 정일권 참모총장의 얼굴이 들어왔다. 침통한 표정 위로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의 손에 있던 한국군 일부의 작전권이 송두리째 미군에 넘어가고 있던 현장이었다. 정 총장은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주 모욕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던 밴플리트 장군의 그 통보를 그저 듣기만 했다.

밴플리트의 통보는 또 이어졌다. 3군단에 속해 있던 9사단을 미 10군단에 배속하고, 3사단을 한국군 1군단에 배속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가혹한 통보였다. 전쟁 발발 뒤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한국군의 위상이 크게 무너진 것이다. 더구나 2군단이 1950년 10월 중공군 1차 공세에서 무너져 없어진 뒤, 3군단마저 중공군에 의해 무력화됨으로써 해체된 것이다. 국군으로서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내가 이끄는 1군단뿐이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권 이양에 관한 서한’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총사령부에 전달하고, 맥아더 장군이 7월 17일 이를 수락함으로써 넘어갔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들은 전선의 일부를 국군이 맡게 하는 형식을 취했다. 한국군 군단은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지휘를 받도록 사실상 승인했던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를 다시 정식으로 거둬간 것이다. 물론 사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양해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3군단의 해체에 가슴이 아팠다. 중공군에게 밀려 무너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지만, 미군으로서도 3군단을 유지하는 데 거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3군단이 미 8군의 마지막 전투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사유는 육군본부가 펴낸 전사에 잘 나와 있다.

그에 따르자면, 밴플리트 장군은 3군단이 인제에서 중공군에 쫓겨 계속 밀릴 때 군단장에게 하진부리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3군단은 5월 21일에 다시 후퇴를 거듭해 횡계리에서 영월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육본 전사는 이를 두고 “이것이 제3군단의 해체에 결정적이고도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적고 있다.

나는 그런 밴플리트의 통보를 들으면서 국군에 대해 생각했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국군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대해서였다. 우리 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받고서 분투에 분투를 거듭한 것은 사실이다. 잘 싸웠다. 변변치 못한 무기를 손에 들고,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피와 땀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늘 허약했다. 정신력은 갖췄지만 용기만으로 나설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늘 그런 국군만을 골라 공격을 해왔고, 3군단의 해체에서 보듯이 늘 그렇게 우리는 뚫렸다. 무엇인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야 했다. 그 답을 어디에서 찾을까. 미군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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