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길이'원칙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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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과민한 탓인지, 비행기를 탈 때면 비좁은 3등석의 팔걸이를 둘러싼 신경전 때문에 늘 마음이 꺼림칙하다. 용케 옆자리가 비거나 서양 사람이라도 앉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덩치 큰 그들이지만, 적어도 팔걸이를 침범해서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이다. 여성이나 미성년 승객은 다르지만, 슬금슬금 팔걸이를 침범하거나 당연한 듯 독차지하기 일쑤다. 심한 경우 옆자리로 팔꿈치가 넘나들기도 한다. 아예 기내방송으로 팔걸이는 비워두라고 안내해 주거나, 차라리 교대로 팔걸이를 점유하기로 쌍무계약을 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비행기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열차나 고속버스·영화관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유자산을 제것인 양 사유화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버스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거나, 온천 냉탕에서 수영 실력을 뽐낸다든지, 한증막에서 수염을 깎거나 땀을 훔치며 체조에 몰두하는 것 역시 이런 범주의 무례에 속한다. 독일 사람들이 한증막에서 흘린 땀 한 방울조차 고스란히 수건에 되받아 나오는 관행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4대문'으로 희화화된 최근의 부패 스캔들도 따지고 보면,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는 팔걸이를 슬쩍 낭탁(囊?)하려던 과욕이 화근이었다. 대통령의 인척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보물선 탐사에 공권력을 동원한 사례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동기(同氣)의 권세를 배경으로 감세(減稅)를 청탁한 사례가 곧 그러하다. 남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제 일에만 충실했더라면 될 터인데, 주제넘게 "항아리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올려다 본" 셈이 아닌가. 무슨 '게이트'만 터지면 국정원과 검찰이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유엔이 제정해 전세계 공직자가 지키도록 권고한 행동강령에는 이른바 '팔 길이(arm's length)'원칙이 적시돼 있다.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로 풀이되는 이 원칙은 서구에서는 이미 보편화해, 규제ㆍ조세ㆍ반부패ㆍ문화정책 등의 분야에서 "간섭하지 않는다" 또는 "중립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공무와 관련해 친지나 친인척과 같은 특수관계인에게 남다른 호의를 베풀거나 이례적인 편의를 제공하면, '팔 길이' 원칙에 위배되는 부패한 행위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러한 '팔 길이'원칙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다. 예컨대 해외주재 외교관인 친구로부터 근무시간 중 현지에서 안내를 받는 것은 세금을 낭비하는 불법행위다. 그러나 그 정도의 편의나 청탁에 대해서는 대부분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 구축해 놓은 폭넓은 인적 연계망을 활용할 기회가 도래한 것에 득의만면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까. 사정이 이럴진대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사람들이 한결같이 억울하다거나, 별일도 아닌데 마녀사냥 식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한다고 푸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누구든 선물과 뇌물, 접대와 향응, 편의와 특혜, 문의와 청탁의 미묘한 차이를 판별할 수 있게 하려면, '팔 길이' 원칙을 담은 행동강령을 국제적인 눈높이에 맞춰 구체화하고 시민교육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밥도 한끼 못 먹느냐" "골프만 쳤을 뿐" "반면식(半面識)밖에 없다" "공정하게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꾼 돈이지 뇌물은 아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본 게 전부"라는 구차한 변명이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윤리강령은 놀랄 정도로 엄격하다. 직무와 관련된 선물은 일절 받을 수 없고, 생일선물마저 아랫사람이 주면 용인되지 않는다. 음료수와 도넛 같은 간이음식 외에 식사는 제공할 수 없으며, 심지어 '카 풀링' 출퇴근도 부하가 운전하면 뇌물로 본다. 부하나 이해관계자로부터 돈을 꾸는 것이 금지됨은 물론이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제3자가 의심할 수 있는 정황, 곧 '외관상 부패'를 유발해도 책임을 져야 한다.

3등석 팔걸이를 침범하지 않는 '팔 길이' 원칙이 존중돼 느긋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고, 어지러운 '게이트'도 사라질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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