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이번엔 헝가리 한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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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유로화 가치가 7일 아시아 시장에서 한때 1.18달러대로 하락했다. 유로에 1.18은 상징성이 큰 숫자다. 1999년 유로화 출범 당시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유럽은 ‘잃어버린 11년’을 보낸 셈이다. 유로화의 급락은 ‘헝가리 국가부도’ 발언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헝가리 경제 는 유럽 전체로 보면 무시해도 될 만큼 작다. 헝가리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뢰 문제가 더 크다는 얘기다. 유럽 국가들조차 다른 나라 정부를 못 믿고, 은행은 다른 은행을 의심한다. 이런 유럽을 세계 금융시장이 신뢰할 리 만무하다. 한국 증시와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어 6~7월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채무 만기일이 줄줄이 닥친다.

유로화의 추락

유로화 가치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헝가리였다. 그러나 헝가리는 유로화를 쓰는 국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유로화 가치가 하락한 것은 유로화가 단순히 유로존 16개 나라의 통화가 아니라 유럽을 상징하는 통화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헝가리처럼 작은 변수에 유로화가 4년 만에 1.18달러대로 하락했다는 점이다. 1.18달러가 갖는 상징적 의미까지 감안하면 “유로는 어떤 통화보다 안정된 통화”라는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말이 무색해졌다.

유로화 약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유럽 위기가 단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시장에선 ‘1유로=1달러’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는 지난달 “유로화 가치가 1달러 밑으로 하락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유로화가 1달러 수준으로 갈 가능성은 적다. 모건스탠리는 유로화 가치가 1.15~1.2 달러 대에서 거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선물 전승지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1.182달러 선이 지지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주 열리는 유럽중앙은행(ECB) 통화정책위원회가 추가적인 시장 안정대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속도 조절의 가능성은 있지만 유로화 약세는 대세라는게 시장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ECB나 유로존 국가들이 하락을 용인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유로 가치 하락이 수출 확대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긴축 정책에 들어간 유럽이 내수를 통해 경제를 살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LG경제연구원 유승경 연구원은 “수출 경쟁력이 낮은 나라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유로화는 하락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선데이 데일리그래프의 설문조사(6일자)는 한 발 더 나갔다. 런던 금융가의 실물경제학자 25명 중 절반이 “5년 안에 유로권의 모습이 바뀔 것”이라고 답했다.

외환시장을 출렁이게 한 불안의 시작은 아주 작았다. ‘국가부도(디폴트)가 과장이 아니다’는 헝가리 총리실 대변인의 말 한마디였다. 곧 진화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표적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까지 “헝가리의 디폴트설은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시장은 듣지 않았다.

이유는 뭘까. 뉴욕 타임스(NYT)는 6일 유럽에 팽배해 있는 ‘신뢰의 문제’를 거론했다. 누군가는 아픈데 누가 아픈지는 모르는 상황이란 얘기다. 돈을 빌린 쪽도, 돈을 빌려준 쪽도 부실하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수심을 알 수 없으니 아무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은행끼리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융시장이 경색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의 보고서에 따르면 재정위기 국가로 거론되는 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은 2조2000억 유로(2조6000억 달러)를 다른 나라로부터 빌렸다. 이 중 다른 나라 은행과 정부기관이 빌려준 돈이 1조6320억 유로다. 나머지는 비은행권과 기업에서 빌린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어느 은행, 어느 기관이 구체적으로 각각 얼마나 빌려줬는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익스포저(위험노출액)를 공개하도록 돼 있는 도이체방크의 경우 5000만 유로를 그리스에 빌려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소규모 은행이나 모기지 회사, 주정부 은행 등의 통계를 잡기가 어렵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비슷한 셈이다. 그 결과 은행 간 자금 거래는 둔화됐다. 은행의 유럽중앙은행(ECB) 예치금은 지난달 말 3000억 유로를 넘겼다. 각국 은행들이 적극적인 자금 운용에 나서기보다는 저리만 받고 ECB 금고에 돈을 묶어둔다는 얘기다.

부실채권도 문제다. 앞서 ECB는 지난달 31일 ‘2010년 금융안정 보고서’를 통해 유로존 내 은행들이 앞으로 1년 6개월간 1950억 유로(291조원)의 부실채권을 처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은행의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면 점점 채권을 처리하기가 어려워진다.  

김경진 기자



외국인 하루 2661억 순매도 … 유럽계 은행들이 주도
국내 시장 요동

‘한국이 헝가리에 빌려주거나 투자한 금액은 5억4000만 달러(약 6700억원)로 전체 대출·투자금의 1%. 국내 은행이 헝가리에서 빌린 돈은 전혀 없음’.

금융 측면에서 들여다본 한국과 헝가리의 경제관계다. 요약하면 ‘별 거 아니다’다. 그럼에도 헝가리의 후폭풍은 거셌다. 7일 코스피 지수와 원화가치는 동반 급락했다. 한국 금융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는 헝가리 스스로 제기한, 국가부도(디폴트) 가능성 탓에 전 세계적으로 투자심리가 급격히 얼어붙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또 하나는 동유럽권 전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공포심이다. 여기에 만일을 생각한 유럽계 은행의 자금 회수까지 겹쳤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헝가리의 국가부도 현실화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남유럽이라는 ‘자라’를 보고 놀란 투자자들이 헝가리라는 ‘솥뚜껑’을 보고 또다시 놀라 7일 금융시장이 출렁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헝가리로 인한 영향은 곧 사그라들 것이란 게 전문가들이 그리는 공통된 시나리오다. 다만 동유럽이 아니라 남유럽 재정위기로 인해 앞으로 국내 증시가 요동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돈 빼는 유럽 은행=헝가리의 국채는 2009년 말 현재 1365억 달러(약 170조원). 주로 유럽계 은행들에서 돈을 빌렸다. 나라별로는 오스트리아(353억 달러)·독일(308억 달러)·이탈리아(252억 달러)가 많이 빌려줬다. 이런 은행들은 대개 선진국보다 좀 더 불안한 신흥시장에서 주식을 팔아 만일에 대비한 실탄을 확보하게 마련이다.

실제 남유럽 재정위기가 금융권을 흔든 지난달, 한국 증시는 이런 일을 겪었다. 유럽 투자자들이 4조2000억원어치를 순매도하면서 주가지수를 끌어내렸다. 7일 오후 3시까지 외국인들이 유가증권 시장에서만 2661억원을 순매도한 것도 유럽 은행들이 주도했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헝가리로 인한 외국인 순매도는 오래가지 않을 전망이다. 헝가리에 돈을 많이 꿔준 나라는 한국 주식에 많이 투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한국 주식 투자 총액에서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모두 1% 이하다. 외국인 투자 1위인 미국(비중 38.1%)은 헝가리에 꿔준 돈이 별로 없고, 외국인 투자 2위이며 지난달 한국에서 2조2000억원을 순매도했던 영국(12.9%)은 헝가리에 한 푼도 빌려주지 않았다.

◆동유럽 도미노 우려=헝가리가 디폴트 가능성을 언급한 4일, 루마니아·불가리아 등 동유럽 각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도 일제히 상승했다. “남유럽에 가려 있던 동유럽 부실이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투자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민반응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동유럽권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5% 전후로, 10%를 넘나드는 남유럽보다 재정이 훨씬 건전하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한 GDP 대비 정부 부채 규모도 대부분 50%를 밑돈다. 이탈리아(115.8%)나 그리스(115.1%)의 절반 이하다.

최근 폴란드 등지를 직접 방문한 프랭클린템플턴 인베스트먼트 채권운용그룹의 마이클 하젠스탑 부사장은 “남유럽에서 진행 중인 현상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유럽권 도미노는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헝가리의 엄살?=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7일 “(헝가리가) 제 나라 발등을 찍는 발언을 했지만 헝가리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보다 낫다”고 말했다. 실제 헝가리는 그리스보다 경제지표가 훨씬 튼튼하다. 그리스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GDP의 13.6%였으나 헝가리는 4%에 그쳤다. 헝가리는 지난해 경상수지도 흑자였고 44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을 갖고 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헝가리는 제2의 그리스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다.

그럼에도 헝가리가 ‘디폴트 가능성’ 운운한 것에 대해 유진투자증권 곽병열 연구원은 “‘빅 배스(Big Bath)’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빅 배스란 새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의 실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손실을 부풀려 전임 CEO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헝가리는 최근 좌파(사회당)에서 우파(청년민주동맹)로 정권이 바뀌었다.

헝가리의 속내가 어떻든, ‘디폴트 가능성’ 발언으로 인해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은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고 재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정부는 만일에 대비해 국제금융센터 등이 참여하는 모니터링 체제를 24시간 운영 중이다. 기획재정부 윤종원 경제정책국장은 “글로벌 금융시장의 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상태여서 유럽 경제 동향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귀식·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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