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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8) 장제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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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시기의 장제스(가운데)와 함께한 다이안궈(오른쪽)와 장웨이궈. 세 사람의 혈연 관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중일전쟁 시절 임시수도 충칭에 머무르던 쑹메이링은 온갖 병마에 시달렸다. 충칭에 신통한 의사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쑹은 치료를 위해 홍콩행을 택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할 소지가 많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혼자 있기를 싫어했다.

1940년 9월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영어책을 한 권 끼고 다니며 툭하면 신경질을 부렸다. 10여 년 전 북벌군 총사령관의 넋을 빼놓았던 옅은 웃음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급기야는 마시던 찻잔을 집어던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평소 냉정함을 잃지 않던 장은 기겁을 했다. 쑹을 떠밀다시피 홍콩으로 보냈다. 정신 계통의 치료를 받아보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미국인이 저술한 『인사이드 아시아(Inside Asia)』라는 책에 장제스의 차남 웨이궈(緯國)의 생부가 고시원장 다이지타오(戴季陶)라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장은 몰랐다. 장의 영어 실력은 알파벳을 혼동할 정도였다. 다이가 사석에서 “나는 젊은 시절부터 생육 능력이 없었다”는 발언을 한 것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보고할 수 없는 무서운 내용들이었다.

고시원장 시절의 다이지타오. 쑨원(孫文) 사상의 발전적 계승자로 자처했다. 김명호 제공

10월 15일 장제스의 일기는 간단했다. “비서와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치료차 홍콩에 간 사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은 장남 징궈(經國)를 홍콩으로 보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차남 웨이궈가 홍콩에 도착하면 함께 모친의 병세를 돌보라고 단단히 일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이 두 아들과 함께 충칭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허사였다.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다. 성탄절이 다가와도 홍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도 상황은 여전했다. 1월 12일 일기에 “간밤에는 공산당과 집안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썼다. 이튿날에는 “오후에 웨이궈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했다. 매화가 만발했다. 집사람과 함께하지 못해 애석하다”며 처연함을 드러냈다. 14일 일기는 유족들의 요구로 열람이 불가능하다. 장은 28세 때부터 57년간 일기를 썼다.

춘제(음력 설) 전날 밤의 일기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제야를 혼자 보낸다. 나처럼 외롭게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국가 원수가 또 있을까.” 이때 장제스는 이유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환을 재촉하는 편지를 쑹메이링에게 보냈다. 답장의 결론은 “돌아가지 않겠다”였다. 장은 “애정이 지나치면 원망을 낳고, 쾌락의 결말은 비극이다. 집안일처럼 풀기 힘든 것도 없다. 메이링은 몰라야 좋을 일이 많다. 고통은 많고 웃을 일은 적다”고 일기에 적었다.

충돌의 원인은 차남 웨이궈와 다이지타오의 아들 안궈(安國)였다. 쑹메이링은 웨이궈가 다이와 일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줄 알고 있었다. 다이가 생육 능력이 없다면 이건 얘기가 틀려진다. 미국인의 저서와 다이가 사석에서 한 발언을 접한 쑹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웨이궈와 안궈의 생부는 누구란 말인가? 쑹은 장을 의심했다. 큰일 날 사람이었다. 징궈(經國), 웨이궈(緯國), 안궈(安國)라는 이름들도 수상했다. 쑹은 웨이궈와 안궈의 생부와 생모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장제스는 냉정을 되찾았다. 웨이궈를 장남 징궈의 근무처인 장시(江西)로 보내고 홍콩에 장문의 편지를 발송했다. “부부가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내용을 첨가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화들짝 놀란 쑹메이링은 충칭으로 돌아왔다.

장은 평소 아들들에게 “최고의 예술은 적대시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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