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세계경제 ‘권력이동 리스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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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만 넘으면 평평한 길이려니 했는데, 안 보이던 고개가 또 나타났다. 이번에 ‘권력 이동 리스크’다. 시장은 경제정책을 넘어 각국의 정치력을 시험하고 있다.

지난 주말 세계 금융시장은 헝가리의 권력 이동 리스크에 출렁였다. 4일(현지시간) 헝가리 총리실의 페테르 시여르토 대변인의 발언이 불을 댕긴 것이다. 그는 “전 정부가 재정적자 수치를 조작하고 경제상황을 속였다”며 “국가 부도(디폴트) 가능성이 과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파장은 컸다. 유로화 가치는 4년 만에 유로당 1.2달러대 아래로 하락했다.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3.2% 하락하며 1만 선이 깨졌다. 시장은 그리스를 떠올렸다. 그리스는 숫자를 속였고, 새 정부가 들어와서야 이를 고백했다.

이 바람에 시장은 무방비로 당했다. 남유럽 위기로 가려졌던 동유럽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헝가리 정부는 바로 진화에 나섰다. 재정실상조사팀을 이끄는 버르거 미하이 헝가리 국무장관은 5일 “수많은 눈속임이 있기는 하지만 디폴트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은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 만에 바꿀 말을 왜 했을까. 정치적 이유 때문이란 분석이 대세다. 헝가리는 4월 말 총선에서 좌파(사회당)에서 우파(청년민주동맹)로 정권이 바뀌었다. 김세중 신영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대내적으로 국민에게 긴축 필요성을 강조하고, 대외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시키기 위한 포석”이라고 진단했다. 헝가리 정부는 이번 주 초 경제 운용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헝가리만이 아니다. 최근 유럽에서 정권이 바뀐 나라들은 하나같이 이전 정부를 사기꾼으로 몰고 있다. 지난달 정권이 바뀐 영국도 마찬가지다.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은 취임 후 첫 인터뷰(파이낸셜 타임스)의 대부분을 노동당 정부 공격에 쏟았다. ‘마사지’라는 단어까지 동원했다. 그는 “전 정부는 객관적인 전망을 하지 않고 예산에 맞춰 성장률 전망치를 마사지했다”고 말했다.

유럽 위기의 발원지인 그리스도 권력 이동 리스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그리스는 지난해 10월 중도우파(신민주당)에서 중도좌파(사회당)로 정권이 바뀐 후 석 달 만에 위기를 맞았다. 박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새로 집권한 사회당 정부는 재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IMF에 대한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권력 이동 리스크는 선거 과정에서 쏟아진 무책임한 공약에서 비롯된다. 헝가리의 새 정부는 선거과정에서 “긴축보다는 성장에 초점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남유럽 위기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었고, 독일 같은 나라도 추가 긴축을 하기로 한 시점이었다. 그리스는 정치인이 표의 대가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약속하는 게 만성화된 나라다.

그러나 권력 이동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다. 리스크 없는 경제란 없다. 리스크는 관리의 문제이지, 봉쇄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권력 지형의 변화가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총리가 교체된 지난주 일본 닛케이지수는 오히려 1.4% 올랐다. 엔화가치는 하락했지만 엔화 약세가 일본 수출에 득이라는 분석도 많다. 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寬) 교토대 교수는 마이니치(每日)신문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짧은 시간 안에 차기 대표를 뽑아 동요를 막았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일본의 총리 교체가 시장엔 호재”라고 진단했다. 지난주 지방정부의 권력 이동이 시작된 한국도 이제 시장의 시험대 위에 섰다.

◆헝가리 경제=2008년 10월 IMF의 지원을 받았다. 금융위기 여파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다. 원래 약정한 금액 125억 유로 중 86억 유로를 지원받은 후 형편이 좋아지면서 지난해 9월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재정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1%였다. 유럽연합(EU) 평균(6.8%)보다 낮고 그리스(13.6%)의 3분의 1 수준이다.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크리스틴 린도 부사장은 5일 “헝가리는 제2의 그리스가 아니다”고 평가했다. 김학균 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현재 유럽의 최대 불안요인은 헝가리보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6~7월 국채 만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긴축보다 성장에 무게를 두면서, 이게 재정적자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졌다. 일부 관료는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7%대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헝가리는 EU 회원국이지만 아직 유로존에 가입하지 못했다.

김영훈·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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