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채로 짚신 삼을 청렴한 지도층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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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3면

저녁 시간 텔레비전을 통해 그날에 발생했던 게이트 뉴스를 시청하고 잠자리에 들고 나서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펼쳐들면, 밤 사이에 또 새로운 게이트라는 것이 탄생해 활개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불길하고 구린내 풍기는 뉴스와의 습관화된 접촉과 그 모양새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땐, 혹시 나와 같은 백수도 부지불식간에 무슨 게이트에 접속돼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수치심으로 소스라칠 때가 있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소한 일상사들까지 반추해 본 뒤에야 가슴을 쓸어내리는 웃지 못할 일을 경험한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게이트란 말은 이른바 1972년, 워터 게이트란 건물에서 일어났던 도청사건으로 닉슨이 대통령직을 물러난 이후, 권력형 비리를 뜻하는 말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듯하지만, 게이트란 말 속에는 섬뜩한 엽기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절대권력자라 하더라도 이것을 주도하거나 관련된 징후가 보이면, 가차없이 그 직책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우리의 언어정서에 걸맞게 표현하자면, 거짓된 계략 혹은 속임수를 동원해 떳떳하지 못한 일을 도모하다 동티가 난 사건이라야 옳을 듯싶다.
요즈음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게이트란 사건들은 한결같이 계략 혹은 속임수라는 도덕적 질병에 감염돼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이들 사건이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있거나 그 주변에 기생하는 인사들 사이에서 저질러지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후에 들통이 나더라도 오전까지는 배짱 있게 발뺌하고 둘러대는 철두철미한 거짓말로 포장돼 있기도 하다. 또한 한결같이 떳떳하지 못한 돈 혹은 개인의 축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정상들은 게이트라는 사건 그 자체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보다 더 큰 사회적 질병을 유발시키고 있다.
인간의 이름으로 가져야 할 정체성과 가치관을 폭력적으로 훼손시키거나 파괴시키고 나아가 우리가 버리고 가야 할 병폐들을 집합시켜 전시하는 기능까지 뻔뻔스럽게 감당하려 든다. 우리 사회는 이제 선생이 사라지고 말았다.
배울 것이 있어야 선생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는데, 이른바 지도층에 있다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게이트에 연루돼 버렸다는 사실이 속속 들통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짓이 들통나면 노골적으로 변명할 빌미를 찾는다. 과거의 어떤 정권에서도 무소불위로 저질러졌던 일종의 정치적 토착 질병이라는 항변이 그것이다.
사사로운 이득을 챙기는 것에 국가기관을 이용하려는 야비한 음모. 혹은 내게 가까운 사람들의 의리와 인정에 호소해 구린내 풍기는 일에 끌어들임으로써 한계성을 뛰어넘는 위력까지 유지하려 든다. 청렴과 절제는 이제 우리들 곁에서 사라지고 없는 옛것들 중 하나가 돼버렸다.
안동 권씨 문중에는 갸륵하고 청렴했었던 한 벼슬아치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전라도 지방 어떤 고을의 군수로 부임해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때마침 떠도는 역병으로 갑자기 타관에서 숨진다. 그의 선정에 감복해 왔던 고을 주민들은 전라도에서 머나먼 경상도 산골 마을의 본가까지 시신을 메고 가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가계가 궁핍하기 이를데 없었던 망자의 아내는 머리를 잘라 그것으로 짚신을 삼아 전체송장을 메고 온 상두꾼들에게 정표로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받은 마을의 원로들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귀중품이라 해서 또다시 권씨 댁으로 사람을 보내 짚신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을 빗대 '다리를 끊어 짚신을 삼아 보은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은 공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신바람이라는 선동적이긴 하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무슨 바람을 타고 폭발적인 위력으로 우리 사회의 진정성을 더렵히고 있는 게이트라는 이 누추하고 음험한 언어가 사라질 날은 언제이며, 머리채를 끊어 짚신을 삼아 그 은혜에 답할 청렴한 지도층은 언제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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