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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은 수박만 하게 보이고 장거리 퍼트도 쏙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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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호 16면

최경주(오른쪽)와 타이거 우즈가 지난 4월 마스터스에서 퍼트라인을 살피고 있다. 최경주는 우즈와의 시끄러운 동반 라운드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평소보다 더 좋은 성적을 냈다. [중앙포토]

최근 캐나다에서 한 클럽 프로가 조그마한 지역대회에 나가 후반 9홀에서 11언더파 25타를 쳐서 화제가 됐다. 주인공인 제이미 쿠렐룩은 파 3홀, 파 4홀에서는 모두 버디를 잡았고 2개의 파 5 홀에서는 모두 이글을 했다. 이 대회는 우승 상금이 6000달러인 미니 투어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공식 대회였다. 공식 대회에서 9홀 25타를 친 기록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는 것이 골프계의 얘기다. PGA 투어의 9홀 최저타 기록은 코리 페이빈의 26타이며 깨지기 매우 어려운 기록으로 꼽힌다.

스포츠의 기적을 일구는 ‘ZONE’의 세계

쿠렐룩의 전반 9홀 성적은 더블 보기 하나와 보기를 포함해 이븐파였다. 그것이 그의 평소 실력이었을 것이다. 쿠렐룩은 후반 9개 홀에서 자신의 실력보다 훨씬 뛰어난 기적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골프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기적은 종종 나온다. 아마추어 수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평균 타수 100타가 넘는 주말 골퍼가 몇 개 홀 동안 버디 하나를 곁들인 연속 파를 잡는 것 같은 일들이다.

이런 이변은 선수들이 얘기하는 대로 “컨디션이 좋았다”는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다. 스포츠 심리에 대해 미국에서 공부한 신경정신과 이택중 박사는 “이른바 야구공이 수박만 하게 커 보이고, 아무리 먼 퍼트라도 반드시 들어갈 것 같은 확신이 생기며 실제 들어가는, 그 무엇이든 가능한 독특하고 꿈 같은 무아지경 몰입의 시기가 존재하며 이를 ‘ZONE’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또 “2008년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 타이거 우즈가 8m 우승 퍼트를 성공시킨 후 기쁨에 모자를 집어 던지며 어퍼컷 세리머니를 했는데 잠시 후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에게 ‘내 모자가 왜 저기에 있느냐’고 물었다”면서 “이처럼 목표에 집중해 다른 것은 기억도 할 수도 없는 시기가 ZONE 속에 있는 상태”라고 했다.

마이클 조던

최경주는 올해 마스터스에서 섹스 스캔들로 뜨거운 관심의 주인공이 된 타이거 우즈와 함께 4라운드 내내 경기하면서도 평소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다. 특히 우승경쟁에 뛰어들면서 긴장감이 극에 달하던 4라운드 초반 이 ZONE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동반자인 우즈는 첫 티샷을 옆 홀 페어웨이로 보냈고 벙커에서 한 번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등 어지러운 경기를 했다. 반대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리커버리샷으로 환호를 받기도 했다. 이런 오락가락하는 동반자와 함께 경기하면 자신까지 흔들리게 된다. 최경주는 그러나 오히려 타수를 줄여 나가 공동 선두에까지 올라갔다.

그런 몰입지대 속에 있는 기간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평생 타율이 2할6푼인, 수비력 때문에 경기에 나가는 그저 그런 야구 선수가 특정 시즌 4할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무명 선수가 플레이오프 단기 시리즈 몇 경기에 불꽃을 피우는 일이 나온다.

ZONE이라는 개념은 헝가리 출신의 미국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구체화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작업 중 주위 소음 등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생산성과 창의력이 극도로 높은 이 몰입의 기간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려 시도했다.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 등 위대한 선수들은 이 ZONE에 더 자주 들어가고, 한 번 들어가면 더 오래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다른 선수들도 그들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경주가 마스터스 4라운드에서 끝까지 ZONE에 머물렀다면 우승이 가능했으리라고 그들은 본다.

골프 심리학자인 토머스 페레로는 이 몰입경에 들어가기 위한 기반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긴장이 없고 다음 샷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있는 것을 말하는데 몇 개의 굿샷이 연속적으로 이어졌을 때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감은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금방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레로는 “경기를 잘하고 있어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는 걱정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가 나온다. 샷을 하기에 앞서 다음 샷을 시각화해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려 놓을 필요가 있다. 긍정적인 시각화는 자신감을 이어지게 한다”고 말했다. 가상의 바구니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걱정이 생길 때마다 몸에 달려 있는 바구니로 집어 던지는 그림을 그리고 영원히 당신의 몸과 분리된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최경주는 성경구절을 들고 다니면서 쓸데없는 근심을 떨쳐버린다.

ZONE에 머물기 위해서는 집중력도 중요하다. 일반적인 집중력과는 다른 개념이다. 최경주는 “어떤 선수들은 카메라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위 갤러리는 물론 멀리서 지나가는 마차까지 세우고 때론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잡념을 이길 수 있는, 주위 환경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몰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음과 자연,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게 하라는 선(禪)철학의 잠언과 비슷한 얘기다. 퍼팅에 매우 뛰어났던 벤 크렌쇼는 “퍼팅이 잘되는 날엔 그린과 몸이 일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홀 컵 속 흙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집중력은 목적에 모든 것이 포커스되어 있고 긍정적이며 마음과 몸이 하모니를 이루는 우주가 되는 것”이라고 페레로는 설명한다. 몸으로 느끼는 것은 좋지만 언어는 마음과 몸의 본능을 구체화하게 되면서 방해 요소가 된다고 한다. 젠(禪)골프를 쓴 조셉 페런트는 “‘원숭이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원숭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원숭이’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하지 마’는 그냥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책에 썼다.
상대와의 경쟁과 맑은 공기 등 라운드에서 즐거움도 찾아야 한다. 골프를 하다 보면 지나치게 스윙에 대해서 분석하거나 스코어에 강박적이 되기 싶고, ZONE에서 쫓겨 나올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서명을 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한다. 만약 자신의 서명을 분석하고 이 매뉴얼에 따라 하면 제대로 된 서명이 나오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로니컬하지만 침착함뿐만 아니라 적절한 흥분도 ZONE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스포츠는 경쟁이고 상대에 대한 공격에 뛰어나야 한다. 승리감 같은 흥분상태가 너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몸속에 있어야 ZONE 속에서 머물 수 있다. 우즈의 어머니 쿨티다는 독실한 불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상대를 박살내라”고 가르쳤다. 건강한 형태의 자아도취 상태를 만들어 흥분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다. 우즈는 2000년 US오픈에서 10타 차로 앞서고 있는데도 점수차를 더 벌리면서 코스와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안니카 소렌스탐을 가르친 피아 닐슨은 제자들에게 경기 중 되도록 상대와 말을 하지 않게 한다. 말을 하면 상대를 이길 때 드는 짜릿함이 죄책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상대를 박살내기 위해 입을 봉하는 라운드는 아마추어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대신 ZONE에 머물기 위해서 “골프 속에 부처의 가르침이 있다. 골프를 수행의 도구로 쓴다”는 골프광 승려 마빈 하라다의 레슨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욕심을 버렸을 때 공은 똑바로 멀리 나가는데 몇 번 굿 샷을 하면 내 실력이 뛰어나구나, 멋진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형편 없는 샷이 나온다. 분노가 폭발하고 무리하게 만회하려다 나락에 빠진다. 자아를 버려야만 라운드 내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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