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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얼룩진 역대 대통령의 처가 식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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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있으면서 국가정보원.해군.해경 등을 보물 발굴사업에 동원한 이형택씨는 김대중 대통령(DJ)의 처조카다. 이희호 여사의 큰오빠인 강호(康鎬.작고)씨의 차남이다.

재정경제부 산하기관의 임원에 불과하지만 李씨의 부탁은 청와대 이기호 경제수석에게도 먹혔다. 더구나 李씨는 한나라당이 "DJ비자금을 관리했다"고 주장한 인물. 여권 인사들은 그런 李씨를 무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의 처가 식구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국가기관을 주무르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학계에선 대통령들의 처가관리가 철저하지 못했고, 친인척들의 권세놀음을 막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 주요 사건마다 '처가 배후설' 나돈 전두환 정권=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1981년 3월 취임 직후 통치의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정의사회 구현'이란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1년 만인 82년 4월 이철희(李哲熙)-장영자(張玲子)부부의 7천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 全대통령의 처삼촌이자 張씨의 형부인 이규광(李圭光)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관련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국정지표는 냉소의 대상이 됐다.

민심은 분노했다. "더 큰 손은 청와대 안주인"이라는 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유학성(兪學聖) 당시 안기부장은 全대통령에게 "부인 이순자(李順子)여사와 친인척의 공적.사적 활동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허화평(許和平) 당시 청와대 정무1수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全대통령은 장인 이규동(李圭東.작고) 대한노인회장의 사퇴 등 일부만 수용했다. 직후 兪부장과 許수석은 경질됐다.

이규동씨에 대해선 83년 8월 탈세혐의를 받은 명성그룹(회장 金澈鎬)의 배후설이 돌았고, 한보 정태수(鄭泰守)회장과의 유착설도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李씨는 박봉환(朴鳳煥) 당시 동자부 장관에게 "LNG기지 건설공사를 한보에 맡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朴장관은 다음 개각때 재무부 장관으로 옮기는 것이 유력했으나 도리어 실각했다. 李씨가 그의 승승장구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의 정설이었다.

5공 시절 새세대심장재단과 새세대육영회 회장을 맡았던 이순자 여사도 당시 재단 설립비 등의 명목으로 정치자금을 거둔 것으로 김영삼(YS) 정권 때 검찰에 의해 확인됐다. 李씨의 동생 창석(昌錫)씨는 6공 초 5공비리 청산 때 탈세.횡령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 처가가 국정에 깊숙이 개입한 노태우 시대=노태우(盧泰愚)대통령 시절엔 처가의 파워가 더 커졌다.

盧대통령의 부인 김옥숙(金玉淑)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철언(朴哲彦)씨는 사조직 '월계수회'를 앞세워 6공 말기인 92년까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황태자'로 불렸다.

盧대통령은 그를 위해 청와대 정책보좌관 자리를 신설했고, 13대 국회의원(전국구)까지 겸직케 했다. 그는 소련과 동구권을 대상으로 한 '북방정책'을 주도했고, 그의 사무실엔 북한과의 핫라인도 개설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金여사는 盧대통령과 함께 취임식장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박철언이 대선 때 애쓴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8년 5월 안무혁(安武赫)안기부장은 그런 朴씨를 문책하라고 盧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사표를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朴씨는 YS의 대통령 취임 직후인 93년 5월 슬롯머신 업계 대부 정덕진 형제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다.

盧대통령의 처남 김복동(金復東.작고)씨와 동서 금진호(琴震鎬)씨도 '청와대 가족모임' 등을 통해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육.해.공군 예비역 장성 5백여명으로 구성된 '송백회'회장을 맡은 金씨는 군 인사에, 상공부 장관을 지낸 뒤 무역협회 고문으로 있던 琴씨는 경제부처와 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6공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琴씨는 YS 시절 '노태우 비자금'의 세탁을 중개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옥숙 여사는 야당으로부터 "재벌총수 부인 등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공세에 시달렸다.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친인척 부정부패 진상조사위'는 金씨의 뒤를 열심히 캤다. 金씨는 주식투자에도 관심이 많아 부속실 비서가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주가동향을 자주 문의했다는 게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다.

◇ "대통령의 의지와 공적 시스템 가동으로 비리 예방"=반면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처가관리에 엄격했다. 장조카인 박재홍(朴在鴻) 전 의원을 제외한 친인척들의 청와대 출입을 금지했다. 조카사위인 자민련 김종필(金鍾泌)총재가 "朴대통령 친인척들은 자신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던 박승규 당시 민정수석을 가장 미워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차남 김현철의 국정 간여에 대해 관대했던 YS도 처가에 대해선 냉정했다. 그는 93년 1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처남 손은배씨가 교총회장 후보로 추천되자 불쾌감을 나타냈다. 결국 孫씨는 경선을 포기했다.

YS 시절 처가 쪽에서 물의를 빚은 사람은 조선대 운영과 관련해 돈 1억9천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준 혐의로 구속된 사촌처남 손성훈씨 정도다.

이화여대 김석준(金錫俊.정치행정학)교수는 "대통령이 처가의 신세를 진 데다 취임 후에도 친인척들을 비선조직의 일원으로 활용하려 하기 때문에 비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여나감과 동시에 대통령 공식 보좌조직이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일.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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