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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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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창순(사진) 전 국무총리가 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92세.

한국은행 총재,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비롯한 요직을 역임한 유 전 총리는 격동의 세월에 한국 경제와 재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로였다. 고인은 한국 경제의 근대화를 이끌고, 자유시장 경제의 토대를 만들어 확산시킨 주역이었다. 1918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양공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헤이스팅스 대학을 졸업했다. 51년 한국은행 동경지점장을 시작으로 뉴욕사무소장·부총재를 거쳐 61년부터 이듬해까지 제6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유 전 총리가 한은 뉴욕사무소장으로 있던 55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했다. 당시 IMF가 한국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가입을 거부하자 고인이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일제 강점기 통계를 찾아 자료를 만들었다. 62년 상공부 장관, 63년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면서 3공화국 초기 근대화 계획을 주도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67년엔 롯데제과 회장을 지냈다. 영어가 유창했던 고인은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재직하던 81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올림픽 유치에 큰 역할을 했다. 이어 82년엔 제15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 호남석유화학 회장, 한국창업투자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2년 5월 26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 수교 1백주년 기념 미국상품전 개막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 왼쪽부터 정주영 전경련 회장, 워커 주한 미국대사, 유 총리,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사절단장 라이먼 렘니처, 김용식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신병현 무역협회 회장. [연합뉴스]

유 전 총리는 89~93년 전경련 회장(19~20대)을 지냈다. 비기업인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민주화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반기업·반기업인 정서가 심해지자 재계 회장들이 영입한 ‘구원투수’였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고인은 기업에 대한 반감과 노사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해 현안을 원만하게 조정하고 전경련을 무난히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고인이 가장 역점을 기울였던 것은 규제개혁이었다. 유 전 총리는 “정부 관리들은 흔히 기업가를 믿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높은 차원의 생각은 자기만 가졌기 때문에 민간의 활동은 규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생각이 없어져야 우리 경제가 바로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정부도 전직 총리가 이끄는 전경련의 규제개혁 건의를 대폭 수용했다.

고인은 자유시장경제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자본주의는 근본에 있어서 국민 모두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고 개인의 자유·창의력·능력 등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국가들을 앞설 수 있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고인은 현대그룹의 창업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각별했다. 2002년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의원이 이끈 ‘국민통합21’의 창당준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적십자대상 태극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애자 여사와 아들 순정·순형·순일·순호·순제씨와 딸 진명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5일 오전 9시. 02-3010-2631. 장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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