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스크린 쿼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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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DJ)대통령이 후보시절이던 1996년 말, 정확히는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대선을 1년 앞두고 후보들을 정밀 분석하기 위해 여섯명의 기자가 동원된 집단 인터뷰였다.

문화분야의 질문을 맡았던 기자가 문화정책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21세기에는 문화가 국력이다. 문화가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주라기 공원'을 예로 들었다. 이 영화가 벌어들인 8억5천만달러는 우리가 자동차 1백50만대를 수출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는, 당시 문화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던 말이었다.

'준비된 후보'답게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정답'을 내놓은 그였지만 특히 문화에 대한 인식은 타 후보에 비해 앞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 영화계가 아직 DJ가 언급한 '주라기 공원'같은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 영화산업은 그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99년 '쉬리'를 시작으로 지난해 '친구'에 이르기까지 속칭 '대박'이 연이어 터지면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소재가 조폭이나 코미디물에 편중되는 등 질적인 면에서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일이다. 지난해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에 육박했고 수출도 1천만달러를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자본과 기술에서 골리앗 격인 할리우드에 맞서 이처럼 선전하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뿐이다. 인도라는 좀 특수한 경우를 빼곤 프랑스가 문화국가의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으나 갈수록 세불리다.

이제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영화의 활화산 같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한마디로 관객동원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좋은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의 공이다. 그러나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를 1백6일로 규정한 스크린 쿼터제의 덕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이 스크린 쿼터를 대폭 축소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미투자협정 체결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정부야 경제논리를 내세우지만 영화계는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돌팔매를 빼앗는 처사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보시절부터 문화를 강조해온 DJ지만 어차피 이제 '문화대통령'소리를 듣긴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모처럼 중흥기를 맞은 한국영화에 찬물을 끼얹은 대통령으로 기억돼서야 하겠는가.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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