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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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88년 내가 부산지검장에 부임했을 때 지역 경제는 물론 주민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시급히 해결돼야 할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합철강 사태였다.

1985년 2월 부실기업 정리 조치로 국제그룹이 해체되고 연합철강이 동국제강으로 넘어가면서 분규가 시작됐다. 파업이 1백85일이나 이어졌다.

나는 사태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면밀히 검토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여러번 열렸고 부산시장이 근로자 대표들을 설득했다. 나는 이같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법 경시 풍조만 키운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머리띠를 두른 연합철강 근로자 수백명이 검찰청사 철제 정문을 부수고 청사 진입을 시도하면서 연합철강을 인수한 동국제강 간부들을 처벌하라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도 퇴근 무렵에 자주 목격했다.

근로자 1천여명은 교대로 서울로 올라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은 물론 야당 당사,세종로.과천 정부청사 등에서 55일 동안 시위를 계속하는 등 시위는 부산지역을 벗어났다.

이 분규와 시위는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순수한 노동쟁의가 아니었다. 동국제강의 연합철강 주식 소유권을 문제삼아 장기 파업을 하는 등 일터를 파괴하는 불법집단의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근로자들이 그토록 장기간 서울에서 농성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 소유주의 지원이 결부된 불순한 동기와 관련기관의 우유부단한 대응에도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때마다 검찰청 정문을 버스로 가로막고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하는 근로자들을 거의 매일 보면서 오랫동안 끌어온 사태를 종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근로자측은 물론 그들이 처벌을 주장하는 회사 간부들을 같이 처벌하는 것이 사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고 결론지었다.

쌍방의 고소.고발 사건 가운데 노동자들이 고소한 연합철강 간부들은 회사를 동국제강에 넘길 때 회사 자산을 실사하면서 낮게 평가한 혐의로 구속하기로 했다. 노동자측인 '연합철강 정상화 추진위원회' 간부 7명은 업무방해 및 폭력행위 혐의로 처벌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보안 유지를 위해 검찰총장에게만 보고하고 전격적으로 수사를 착수했다. 왜냐하면 부산시장은 물론 다른 기관장들도 장기적 해결을 모색하면서 근로자들을 설득하고 있어 검찰의 강경 방침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산시장 등의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근로자들과 회사 간부들을 그들의 고소.고발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며칠 동안 계속 소환해 조사하다가 어느 날 전원을 소환한 다음 전격 구속하도록 검사들에게 지시했다.

언론과 공안 관련기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떤 정보기관은 장기간의 폭력.파업사태에 신임 검사장이 너무 강경한 처리를 해 근로자들의 반발을 사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등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근로조건을 나쁘게 해 근로자들을 괴롭히는 사용자에게는 마땅히 상응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영에 간여할 불순한 동기가 있는 노동쟁의에는 강경 대응만이 사태를 빨리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연합철강 분규뿐만이 아니었다.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각 분야에서는 법이 무시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우선 검찰권을 발동하기가 상대적으로 손쉬운 불법건축과 무단용도 변경, 주차장 시설 타용도 사용 등에 대한 일제 단속을 검사들에게 지시했다. 결국 부산 지역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재력가 5명이 전격 구속됐다.

법이 지켜지는 풍토가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서 검찰은 법을 어기는 지도층 인사들부터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전화가 검찰 내부와 서울로부터 여러 번 왔었으나 나는 모두 거절했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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