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산업재해 범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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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한 유통회사에 근무하다가 갑자기 숨진 Y씨 가족들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유족보상금 등을 받지 못한다"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했다.

가족들은 Y씨가 외환위기 이후 실직 공포에 시달리다가 1999년 초 잠을 자다 갑자기 숨지자 근로복지공단에 보상금 지급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었다.

올 3월(예정) 산업재해보험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발효되면 이렇게 재판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업무상 스트레스 등이 대폭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20일 "새로운 직업병이 급속히 증가하고, 이들 질환이 재판에 가서 산업재해로 인정되는 산업현장의 현실에 맞추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 인정 질병.기준=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트레스성 정신질환과 업무상 과음으로 인한 간질환을 처음으로 산업재해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스트레스.간질환이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발병 전 6개월 동안 정신장애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업무로 강한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같은 기준을 충족시킨다 해도 유전적 요인 등 신체적 특성에 따른 정신질환을 지니고 있었거나 업무 외의 심리적 부담으로 인해 병을 얻었으면 보상에서 제외된다.

간질환의 경우 종류를 독성.급성.전격성.만성간염과 간경변증 및 원발성 간암으로 그 대상을 제한했다.기존의 간질환이 악화돼도 보상 대상이 된다.

간 기능이 나쁜 사람이 일정 기간 이상 '술 상무' 노릇을 하다가 간이 급작스럽게 악화됐을 경우다.

작업장에서 유해물질에 노출 또는 중독됐을 때도 혜택을 받는다. 유해물질은 디옥산.에틸알콜.니트로메탄 등 30여개 물질로 정했다.

◇ 효과.문제점=산재보험의 혜택을 보지 못하던 많은 신종(新種)직업병 근로자들이 구제받는다.

업무상 재해가 확실하면 소송 비용까지 들여가며 재판까지 갈 필요가 없다. 산재보험의 재정부담은 크게 늘 전망이다. 하지만 이번 개정으로 사업주와 근로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더 나갈 우려는 별로 없다.

노동부가 확보하고 있는 산재보험기금의 규모가 새로 인정되는 재해에 따른 보험급여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산재보험기금은 2조2천7백억원이며 지난해 각종 명목으로 지출된 산재보험급여 규모는 1조5천7백14억원(11월 말 현재)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번 규정 개정으로 1천억원 정도의 추가 지급 요인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시행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확대대상 질환 가운데 의학계에서 업무상 재해의 인과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개정안의 근거를 마련한 서울대 의학연구소의 연구진조차 "특정 간질환의 경우 업무상 발병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아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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